박주탁수산중공업사장(42). 중장비 특장업계에서 그는 신화적인 인물로
꼽힌다.

중공업분야에서 거의 현장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텃세가 세기로 이름난
중장비특장업계에 뛰어들어 8년만에 권좌를 차지해서다.

그는 기술분야를 전공하지도 않았다. 줄곧 무역분야에서만 일해왔다.

73년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수출입분야에서만 7년간 일해온 것이
그의 기업경영경험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박사장은 84년 갑자기 중장비특장업계에 진출했다.

주위의 심한 만류에도 불구,무역업체를 경영하며 모아둔 "꾀많은 돈"을
모두 털어 경기도 화성에 특장품공장을 차렸다.

84년12월에 공장을 준공했다. 이곳에서 생산한 주요품목은
유압브레이카와 트럭크레인.

가동첫해인 85년의 매출은 19억2천만원규모. 단숨에 알찬 중소기업수준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 판매고는 매년 급증을 거듭했다. 올해 수산의 매출목표는
7백억원규모.

설립첫해에 비해 무려 37배나 늘어난 수치다.

이같은 엄청난 성장의 비법은 무엇일까.

박사장은 이 물음에 대해 "남다른 경영비법이 있는것은 아니고
마케팅분야와 기술개발분야를 잘 접합시킨 것이 큰성과를 거둔 것 같다"고
분석한다.

박사장은 10년가량 무역분야에서 세일즈업무를 맡다보니 수요자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데는 기술분야전문가들보다 더 앞섰다는
것.

특히 해외세일즈활동을 하면서 선진국공장을 많이 둘러봐
가공공정분야에서는 상당히 높은 눈을 갖게된것도 사내전문기술자들의
기술개발의욕을 북돋우는데 크게 도움을 줬다고.

개발된 기술이 빨리 팔려나가는데 자극을 받아 수산이 새로 개발해낸
중장비분야의 기술은 이미 25가지에 이른다.

유압브레이가를 비롯 아스팔트살포기 콘크리트분사로보트 5t래카 크레인
굴절식크레인등이 그것이다.

수산이 개발해낸 25가지 장비는 모두 국내에서는 처음 개발된것이다.

이들 장비는 모두 일본 미국등 선진국제품보다 뛰어나 국내기업들과의
경쟁없이 팔려나가고 있다.

이같은 기술개발성과를 인정받아 지난91년7월에 과기처장관으로부터
벤처기업대상을 받기도 했다.

요즘 수산중공업에 가장 알짜돈을 모아주는 것은 유압브레이카.

이는 바위 콘크리트 암반등을 굴착할때 쓰는 유압식파쇄기로 이회사가
84년 처음개발,상품화한 품목.

박사장은 이 품목에대해 "이미 감가상각까지 끝났음에도 매월13억원씩의
매출을 안겨주는 애착이가는 품목"이라고 밝힌다.

무엇보다 박사장이 무역분야에서 중장비분야로 뛰어들게 한것도바로 이
유압브레이카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박사장이 이 사업에 처음 손을 댄것은 실업자를 면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을 졸업한뒤 상영산업이라는 가발수출회사에 근무하다 그만둔뒤
실업자가 됐다.

77년 봄이었다. 하루는 청계천을 지나다 우연히 이곳에서 공구상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이때는 별로 할일이 없던터라 그와 점심을 같이 한뒤 차도
마셨다.

그뒤에도 여러번 그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몇달뒤 그 친구로부터 공구를
수입해보면 어떻겠냐는 요청을 받았다.

수입업무에 대해서는 잘아는 터라 이를 수락했다.

측정기 드릴 수공구 베어링등을 수입했다. 예상외로 잘 팔렸다. 덕분에
돈도 꾀 벌었다고 한다.

79년4월 (주)수산무역이라는 회사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이때부터 수입한것이 포터블공기압축기와 광산굴착장비.

이 품목들도 별탈없이 잘 팔렸다. 여기에 자신을 얻어 수입키로 마음먹은
것이 바로 유압브레이카.

그러나 박사장은 이 품목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수입통관에서 부터 말썽이 났다. 품목표기가 잘못됐다는 사유로 6개월간
통관을 해주지않았다. 이로인해 자금순환도 여의치않았다.

겨우 통관은 했으나 1년이넘도록 2대밖에 팔리지않았다. 수요처가
많지않은데다 운송비등으로인해 값이 너무 비싸서였다.

박사장은 이때 가장 곤란한 시기를 전환의 기회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직접 유압브레이카를 만들어 팔자"
박사장의 이같은 판단은 적중했다.

1년에 2대팔리던 유압브레이카가 지금은 한달에 1백20대씩 팔려나간다.

현재 수산이 생산하는 중장비특장품은 중장비분야
20가지,특수용도차량분야 20가지등 40여가지에 이른다.

현재 중소형 중장비특장품시장을 1천4백억원규모로 볼때 전체시장의 50%를
수산이 점유하고있다.

선점업체였던 K사 S사등도 이제 두려운 눈으로 보기시작했다.

이같이 남들이 두려워하는 기업인임에도 그를 만나보면 전혀 다른 인상을
받는다. 대학의 연구실 한구석에서나 마주칠수있는 온화한 성품이다.

대학때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수없이 읽었다는 그는 "기업인은
기업인으로서 지킬수 있는 도덕성을 지켜나가는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거듭강조했다.

<이치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