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과연 이 "님"은 누구인가. 지금은 애국시의 백미로 손꼽히는 "님의
침묵"도 처음엔 대단한 연시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단성사가 발간한
"영화시대"란 잡지에 연재될 무렵,요란한 누드삽화가 눈길을 끌만큼
선남선녀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면 퍽 아이러니컬한 얘기다.

연시의 차원이 아니라 사뭇 음시로까지 전락한건 전혀 그안의 시정신과는
상관없는 독자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설은 외설악 신흥사에서
만해의 수바라지를 다한 서여연화보살과의 관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 시가 겨우 정형시의 틀을 깨고 자유시의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에
나타난 "님의 침묵"은 그 한편으로도 이미 현대시의 고전이 됐다고
조지훈은 말했다. 송욱 또한 이렇게 말했다. "님이란 애인이요 불교의
진리 그자체이며 한국인 모두를 뜻한다. 이 시집의 주제는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이다. 중생이다"- 님은 곧 "절대 자유"와 "진아"를 가리킨다.
근대사를 통틀어 만해 한용운만한 인물은 드물다.

독립투쟁사와 불교계,문학과 사상등에 고루 큰 빛살을 던진 거인이다.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자리)쪽으로는 대문도 내지 말라고 호령했던
기개로써 푸르른 생애를 살았다.

시에 배어있는 그 섬세한 가락과 여운은 한 시대를 휩쓸만하고 행간에
서리치는 패기와 울분은 산천초목도 떨게 했다. 말년에 기거했던 성북동
심우장(서울시지정문화재기념물7호)이 원형대로 단장되고 고향 홍성에
세워진 우뚝한 동상과 함께 시비가 빛을 뿜게 된것도 가슴 뿌듯한 일이다.
오는 29일은 선생의 48주기. 이날을 맞아 수덕사에서 추모법회를 갖고
홍성읍에선 시인 박두진 조병화 고은등과 현지 문인들을 중심으로 뜻깊은
만해제가 열릴 모양이다.

또한 이 자리에선 "만해학회"가 출범한다.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우람한 민족시인의 요람지로서 만인의 우러름을 받게 된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만해학보의 발간과 기념관건립등 다채로운 행사를 위해 폭넓은
관심과 성원이 기대된다.

국내에는 이미 괴테학회나 조이스학회 공자학회등 외국인들의 연구단체가
많다. 그러나 국내 순수문인중에선 만해학회가 처음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매화나무의 그림자"만 보고도 갈증이 멎는다. 이 "망매지갈"의
정신으로 살다간 님을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