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작가 버나드 쇼가 하필이면 장마철에 중국의 상하이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쇼가 상하이에 도착한 그날은 드물게
쾌청한 날이었다. 그를 영접한 중국측 인사들은 "이런 우기에 상하이에서
햇빛을 보게되었으니 귀하야말로 대단한 행운아임에 틀림없다"고 그를 잔뜩
치켜올렸다. 당연히 기뻐해야할 그는 오히려 퉁명스런 어조로 이렇게
되받았다는것.
"행운을 안은 편은 내가 아니라 태양이지요. 이런 장마철에 태양이
이버나드 쇼를 상하이에서 보게 되었으니까요"
대단한 자존심이다. 물론 농반 진반의 발언이었겠지만 쇼의 이 짧은
한마디는 태양과 자신을 같은 평면위에 올려놓은 한 지식인의 높은 기상을
엿보게 한다.
문화부는 임진왜란당시의 명재상 서애 유성용을 "6월의 인물"로
선정,서애재발견을 위한 여러 행사를 펼 예정이다.
유성용은 어릴때부터 문재가 뛰어나 출세가도를 달린 엘리트. 16세부터
벼슬길에 오른 그는 왜란의 험한물결이 일기전에 이미 이조 예조
병조판서를 비롯,우의정 좌의정의 중요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정읍현감이란 시골관직에서 허송세월하고 있던 이순신을 전란에 대비해서
전라도 좌수사로 발탁했고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국란에 대비한
초석을 다졌다.
끝내 1592년 왜군이 부산포를 급습,파죽의 세력으로 북상하자 불과
20여일만에 서울은 함락되고 왕(선조)과 대신은 개성으로 급히 피신했다.
이때 왕은 유성용을 영의정에 임명,국난수습의 전권을 맡겼으나 반대파의
근거없는 탄핵으로 곧 파직되었다. 관직을 잃은 그는 오직 구국의
한뜻만을 안고 임금을 따라 의주까지 수행했다. 이것이 바로 백의종사의
효시인 셈이다.
왜란이 일어난지 1년쯤 지나 서울은 수복되었고 그는 다시 영의정에
피임,왜병이 할퀴고 간 상처를 치유하는데 심혈을 바쳤다. 그러나 전난의
고비를 넘긴 조정은 또한번 당쟁에 휘말려들었고 그는 영의정 재직 5년만에
관직을 삭탈당했다.
고향(풍산 하회)에 돌아가 초당을 짓고 칩거하는 그에게 뒷날 선조는 높은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사절,초야를 벗하는것으로 만족했다.
곧은 선비의 자존심을 한껏 누리면서 서애집 징비록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청초한 선비의 한 일생이었다. 권력의 향방에 따라 줄서기에
천재성을 발휘하고있는 요즘 정치인들은 이 6월에 많이 부끄러워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