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7월 한진중공업의 영도조선소야드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든
재야세력과 이회사 노조원들이 총집결해 있었다.
외부행사에 참석했다가 구속된후 의문사를 당한 이 회사의
박창수노조위원장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는것이다.
이들의 입에서는 정부와 이 회사경영진에대한 성토가 거침없이
터져나왔다.
이 돌발적 사건으로 한진중공업은 9주동안 파업에 휘말렸다. "살아있다고
할수없는 형극과도 같은 시간이었다"경영정상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온 송영수사장은 이때가 가장 괴로웠던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89년10월 이 회사의 사장에 취임하면서 91년까지 경영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야심적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1년이 지나면서 현장분위기는 눈에띄게 달라졌고 2년후인
91년에는 6년만에 처음으로 흑자로 전환될 상황이었다.
그룹측에서도 당초 불안한 눈길로 지켜보다가 차츰 낙관적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1년반만에 돌발적 사태가 생기면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듯
했다.
모든 임원들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자신도 사표를
조중훈회장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조회장은 "지금이 어느땐데 수습할 생각은 않하고 사표를
가져오느냐"고 호된 꾸중을 할뿐이었다.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새롭게
힘이 솟았다. 그는 즉시 수습에 나섰다. 다행스럽게 장례식이 끝난후
점차 과열된 분위기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현장근로자들사이에도 좀 심했다는 반성론이 대두됐다. 회사임원들도
현장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
그후 1년. 지금 한진중공업은 회사안팎으로부터 정상화의 기틀을 완전히
닦은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업으로 91년 정상화계획이 1년 미뤄진
셈이다.
올해는 매출3천5백억원에 1백50억원의 흑자를 목표로 하고있다. 현재의
조선 기계 철도차량사업의 기본축위에 신규사업으로 물류사업을 시작, 오는
2000년에는 매출1조원이상의 종합중공업체로 도약할 계획이다.
그는 이상하게도 한진그룹이 인수한 부실기업과 인연이 깊다.
부실기업정상화에는 그가 동원된다.
조선공사의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돼 이회사를 한진그룹에 흡수시키고
사장으로서 정상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지난 87년말에는 대한선주인수 심사단장과 한진해운의 부사장을 맡아
부실기업인 대한선주를 한진해운에 통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는 체제가 다른 이 두회사의 좋은 점만 살려 인사와 급여체계를
정리했다.
한진해운은 그후 최신형 컨테이너선과 부정기화물선을 갖춘 국제적 선사로
부상했다. 그는 69년 대한항공 인수에도 참여했다. 그해3월 대한항공의
총무차장으로 입사,인사 총무 노무부서를 한꺼번에 틀어쥐고 공기업이었던
대한항공의 기존 틀을 과감히 정비해나갔다.
오늘의 한진그룹이 있기까지에는 4차례의 부실기업인수합병이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대한항공 대한준설공사 대한선주 대한조선공사가 그것이다.
이들의 인수과정에는 2명의 서울대법대동기동창이 등장한다.
송영수사장과 그룹운영위원회(전경영조정실)를 이끌고 있는 이태원부사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때로는 혼자 혹은,둘이 같이 등장한다. 특히 나중에 있었던
두차례의 인수과정에는 두사람이 자연스레 역할분담을 한다. 인수의
기본스케줄은 이부사장이 짜고 현장지휘와 빠른시일내 정상화는 송사장이
맡는다.
송사장의 진가는 한진중공업을 조기에 정상화시키면서 빛나고있다. 그는
89년10월 조공사장에 취임하자 노조와 경영진 사이에 팽배한 불신을 없애는
작업부터 했다. 우선 노사간에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것부터 시작했다.
기존인원의 추가감원을 않고 밀린 봉급도 제때에 받도록 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던 본사를 부산으로 철수시켜 사원들간의 위화감을 해소시켰다.
이와함께 3천8백명 전직원을 한진그룹의 신갈연수원에 입소시켜 정신교육을
강화했다. 직반장급에게는 일본조선소등을 견학하도록해 한국의 실정을
알도록 했다. 연간 교육에 투자한돈만해도 약4억원이 넘었다.
이와함께 시설투자 인사혁신 원가개념도입은 물론 사원조합주택마련등
복지분야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나갔다. 또한 그룹계열사인
한진해운으로부터 8억달러에 해당하는 컨테이너선 건조물량이 확보된것도
큰 힘이 됐다.
이에따라 생산성이 점차 향상되면서 조선소야드에 활기가 돌기시작했다.
올해부터는 인수한후 처음으로 세계4개지역에 지점을 설치하는등
해외영업도 강화했다. 올해는 매출을 3천4백억원으로 잡아 지난해보다
40%정도 늘릴 계획이다.
그가 경영인으로 성장하게된 바탕은 대한항공에서 영업을 담당하면서
닦여졌다.
그는 71년6월 파리사무소 개설준비위원으로 발령받은이후 4년동안
파리지점에 이어 뮌헨 함부르크 라스팔마스등에 영업소를 잇따라 열었다.
75년3월에는 유럽노선에 여객기를 주2회 취항토록 했다. 이때 그의 유창한
프랑스어실력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영업담당이사와 상무로 활약했던 81년말부터 7년동안은 그에게
황금기였다. 그는 이기간중 사우디 바레인 제다 다란 쿠웨이트 아부다비등
대부분의 중동라인을 개설했다. 나중에는 필리핀의 마닐라와 사우디의
제다까지 연결시켰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네고의 명수"라는 닉네임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서로 주고 받는것이 있어야 일이 성립이 되는 항공업계에서 그는 줄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이들나라로부터 취항권을 얻어오곤해 주위를 놀라게했다.
이렇게 뚫었던 대표적 사례가 리비아와 이라크였다.
그가 중동의 콧대 센 친구들을 휘어잡을수 있었던 것은 "덩치에
걸맞지않게 맡은 일에 악착같이 달라붙는 집요함과 스포츠맨으로서의
순수한 인간미때문이었다"고 그의 동료들은 들려준다.
그는 목표가 주어지면 몸을 돌보지않고 밀어붙인다. 그것이 끝날때까지
빈틈없이 체크하며 확인을 거듭한다. 그리고 중동친구들이 오면
한강근처의 빈대떡집이나 대포집에 들러 자신과 한국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 기고만장해하던 중동친구들도 그와 이렇게 한번
사귀면 다음부터는 "Y S 송"만 찾았다고 주변에선 말한다.
이같은 크고 작은 일화들 때문에 지금도 그와같이 일했던
대한항공직원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한다. 그도 자신이
"대한항공맨"이었던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지금도 옛동료들과 자주
소주잔을 기울인다.
그는 올해로 한진그룹에 입사한지 25년이 됐다. 이동안 그에게도 몇차례
시련기가 있었다.
69년 한진이 대한항공을 인수한후 그는 총무차장으로 무너진 관리체제를
정비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구지점장으로
좌천됐다. 그는 영문도 모른채 대구에 내려갔다.
조사장(당시)이 파리출장을 지시하며 그를 다시 부른것은 한달이
지나서였다.
또 한번은 75년 파리지점장으로 있다가 마닐라영업소장으로 밀려났을
때였다. 그는 이때 "이제 쫓겨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한편으론 보따리를
쌀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그는 마닐라 노선을 개설하고 8개월만에 다시
조회장의 부름을 받았다. 본사영업부장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귀국도중에 홍콩에서 그를 만난 조회장은 바레인에 가서 여객화물운수권을
따오라고 지시했다. 그 당시만해도 해외건설초기라 중동을 잘모를때였다.
어렵사리 교섭을 해서 운수권을 따가지고 귀국했다.
그는 이때 조회장의 용병술을 알았다. 잘한다고 지나치게 자만하면 엄한
모습을 보이고 또 기가 죽을까싶으면 다시 어깨를 탁탁치며 용기를
북돋워주는 부드러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난81년말 7년동안의 영업담당상무에서 기획담당으로 밀려난 것에
대해서는 그로서도 할말이 없었다. 79년에 있었던 오일쇼크 영향으로
80년과 81년 영업실적이 연달아 적자를 기록한 때문이다.
그가 한진그룹과 인연을 맺은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는 학사장교로
군에입대해 공군사관학교교수부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석사학위를 마쳤고 곧 프랑스유학길에 올랐다.
남프랑스 유도단체가 주는 장학금으로 1년3개월동안 프랑스생활을 했다.
공부를 더 하기위해 미국행을 결심,미국에서 7개월있으면서 뉴저지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후 갑자기 결혼을 하게됐고 우연히 그때 한진이 인수한
인하대학 재단에서 강사로 일하게 된것이다.
그룹내 일부직원들은 그가 조회장과 친척관계인줄 안다. 조회장이 유독
그에게만은 마치 아이다루듯 부담없이 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그의 형(송영균한진투자증권사장)이 유화증권사장으로 있다가
한진에 합류해 그런 추측을 가능케 했다.
그의 형은 증권계통에서만 30년이상 살아온 전문증권인으로 우연히
한진그룹에 합류,오해의 소지가 된것이다.
조회장과 송사장의 관계를 잘아는 사람들은 이같은 추측이 나온 배경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우선 송사장은 한진그룹에서 잔뼈가 굵어
신입사원때부터 조회장과 잘아는 사이이고 또 그룹계열사사장들가운데
젊은축에 들어 마치 아들처럼 대한다는것이다.
그들은 또 대부분의 임원들이 조회장을 어려워해 감히 "노"라는 말을
못하는데 그만은 간혹 자기주장을 관철한다는것이다. 그는 조회장이
"노"를 하면 일단 물러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설명해 조회장의 동의를 얻어낸다고 한다.
그는 기업경영의 요체는 최종적으로 국가사회발전에 동참하고 기여하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각기업은 자기분야에 1인자가 되려는 프로의식을
갖고 기업경영과 사회적 책임을 다같이 완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적자회사는 국가와 사회의 "악"이라고까지 말한다.
그의 이같은 경영철학은 조회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회장은
지금까지 어떤 회사를 인수해도 그 회사의 기존인력을 솎아 내지않고
그들을 가능한한 한진그룹사람으로 만들어낸다는 방침을 고수해오고 있다.
조회장은 또 철저한 목표관리를 경영이념으로 내걸고 있다. 송사장은
이때문에 사업에 관한한 자신은 "조중훈교"의 "교도"라고 말한다.
그가 교도란 말에 익숙한것은 자신이 착실한 원불교신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집안은 원불교도인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도
역시 예외는 아니며 그의 자식들(2남1녀)도 모두 원불교를 믿는다.
그는 늘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의 생활을 해야한다"는 원불교의 가르침을
따른다. 현재 월불교 가락교당의 교도회장이며 대개 일요일이면
빼놓지않고 절에 나간다.
그는 또한 유도를 끔찍이 사랑한다. 유도7단인 그는 보성고2학년때
자신이 앞장서 유도부를 만들었고 자신이 전국 유도챔피언이 됐는가하면
보성고를 우승하게까지 만들었다.
서울대법대에 진학해서는 서울대유도부를 창단하고 중.고.대학이
전부참여한 전국학생유도연맹위원장직도 맡았었다.
그가 부하직원을 다루는데는 이같은 그의 인생관이 그대로 배어나온다.
그를 처음보는 직원들은 그가 6척장신인데다 유도가 7단이라는
선입견때문에 무서워한다. 그러나 그를 겪어보면서 따뜻한 정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아랫사람 다스리는 방법도 부드럽다. 세상만물이 모두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믿고있는 그는 "인화"를 가장 중요시한다. 또 직원들이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일을 하도록 "덕"으로 다스린다. 한번들은
현장근로자들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내 그들과의 거리감을 좁히는가 하면
노조대의원들과도 술자리를 마련해 한바탕 같이 놀아주는 아량이 있다.
그는 또 예에서 시작해서 예로 끝난다는 유도인답게 예의를 철저히 지킨다.
그룹내에서 승진이 빨랐던 그는 직장 또는 학교선배가 직책상 자기아래에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일과시간이 끝나 술자리에라도 옮겨가면
선배를 반드시 상석에 앉히는등 대접을 깍듯이 한다.
그는 음주에 대해 철칙을 갖고 있다. 괴로울때는 절대 술을
마시지않는것이다. 그러나 인화단결하고 내일을 기약하는 좋은 자리라면
주량껏 마신다고 한다.
그의 생활태도는 매우 검소한것으로 평이 나있다. 한번 사입은 옷은
별탈이 없을때까지 입는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사장티를 안낸다.
이같은 그의 성품은 그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것같다. 그의 부친은
일본중앙대학 전문부를 나와 교통부 철도국에 다녔다. 4남1녀의
자식들에게 "사치를 모르는 근면함과 끈기"를 강조했다. 올해76세인 그의
어머니도 종교인으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고교 대학동창들과 자주 어울린다. 특히 그의 형제4명 모두가
보성고 출신이라 모교에대한 애착은 남다른데가 있다. 또한
서울법대14회동창들과도 활발한 모임을 갖고 있다.
그는 "25년동안 바쁘게 살아오면서 가정에대해 가장으로서 세심한 배려와
역할을 다하지못해 늘 미안하다"고 말하며 예의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김영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