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영희국민학교 등 일부학교에서 발견된 정신대 동원 학적부에 기재된
장본인 2명이 서울과 강원도 속초에 살고 있는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 "2백명 함께 끌려가...하루 14시간 중노동" ***
당시 일본 도미야마(부산))군수공장 정신대로 끌려갔던 이들은 강원
속초시 교동과 서울 성동구 행당 1동에 살고있는 이종숙(61),
양춘희씨(61)로 두사람 모두 14 살때인 1944년 7월2일 2백여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반도여자 근로정신대''라는 명칭으로 일본 도미야먀
''후지코시(부이월)공업주식회사''(당시 사장 정촌망희)로 끌려간 것으로
밝혀졌다.(관련사진 있음)
이씨 등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항공기 부품조립을 맡았던 후지코시
군수공장에는 2천여명의 조선여자들이 정신대로 끌려왔으며 이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 고된 군대 제식훈련, 구보, 세뇌교육,합창훈련 등을 1개월동안
받은뒤 기계공,정밀공 등으로 각 단위공장에 배치돼 혹사당하다 대부분
해방직전 귀국했다.
당시 `반도여자 근로정신대''로 투입된 여학생들은 "일본공장에 가면
학교를 다니면서 졸업도 할 수 있고 졸업 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일본에 갔었다.
이씨의 경우 장충고등소학교 고등과 2학년(현재 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 같은 학교 여학생 6명과 함께, 양씨는 덕수고등소학교 고등과
2학년에 다니던 중 같은반 여학생 15-16명과 함께 정신대로 동원됐다.
이와관련, 이씨는 "44년7월1일께 서울출신 50명,인천출신 30명이
마포소학교에 일단 모인뒤 경성부청(현 서울시청)뒷마당에 최종집결한
2백여명과 함께 서울역에서 기차로 부산으로 가 연락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으며,후지코시공장에는 7월6일 수용됐다"고 밝히고
"우리가 도착한 뒤 경상도출신 여학생 수백명이 후발대로 도착,각
공장으로 흩어졌다"고 말했다.
양씨는 " 1개월의 기초훈련에 이어 다시 1개월동안 선반적업기술을
배운후 비행기 톱니바퀴를 제작하는 정밀기계 4과 공장에 함께 끌려 온
50여명과 함께 배치돼 이들과 줄곧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다"면서 "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되면서 회사측이 극비리에 공장을 황해도
사리원으로 옮기게 돼 1차로 2백여명이 45년 7월말께 어뢰를 피해
일주일간 항해한 끝에 청진항에 도착했었다"고 증언했다.
양씨는 이어 "청진항에 도착한 후 `사리원공장에 다시 집결하라는
명령이 있을때까지 집에 돌아가 있으라''는 말을 듣고 집에서 쉬던중
해방을 맞았으며 뒤에 남아있던 여자들이 귀국했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양씨 증언, 일문일답 있음)
이들은 당시 한달에 두 차례 허용된 외출때 가불명목으로 받은 용돈을
제외하고는 월급을 받지 못했으며 기숙사에 작업장별로 40-50명씩
수용된채 매일 새벽4시30분에 기상, 청소와 식사를 마친후 작업장에 나가
밤 늦게까지 일요일도 없이 하루 최소한 14시간씩 일했다는 것이다.
이씨가 그동안 유일하게 간직해오다 공개한 당시 정신대원 수첩에는
후지코시공업주식회사 사가,일본 왕의 교육칙어,후지코시 십훈 등이
인쇄돼있으며 뒷부분에는 강제저축내역 (예금액 87엔)이 기재돼있었다.
이씨는 당시 생활에 대해 "정밀공,기계공으로 일한 사람들의 경우
비교적 고생이 덜했으나 주로 경상도에서 온 여자들은 기계닦는 일에
동원돼 온 몸이 기름투성이였다"면서 "고된 작업말고도 제식훈련 등 각종
훈련이 심해 훈련도중 쓰러져 실려 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