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줄과 씨줄을 촘촘히 엮어 베를 짜던 선인들의 지혜를 잇는다.
제일모직 대구공장 직포과 이범용기장(48)은 오늘도 실타래를 풀어 옷감을
만드는 일에 여념이 없다.
선인들은 간단한 기구를 이용,손으로 작업을 했고 이기장은 자동화된
직포기계룰 다룬다는 것이 다르지만 천을 짜는데 쏟는 정성은 큰 차이가
없다.
이기장이 제일모직에 정식 입사한 시기는 지난 64년 8월.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한 61년부터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임시고용사원으로
일했다. 주경야독시절까지 포함하면 직포와의 인연은 30년이 넘는셈이다.
처음 일을 배울때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선배들이 기술을 쉽게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풍토였다. 당시에는 일자리가
별로 없어 기술전수는 곧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것이란 위기의식이
팽배해있었다. 후배들이 지켜보면 하던일도 멈출정도였다.
달리 전문서적도 없고 그냥 눈동냥 귀동냥으로 배울수밖에 없었던 터라
그는 우선 선배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으려고 노력했다. 퇴근후 선배들을
따라가 식사나 술한잔하면서 이론을 배우고 다음날 남보다 일찍 출근해
부지런히 실기를 익혔다.
기술없이는 살아갈수 없다는 생각에 선배들을 따라다니느라 하루도 편히
쉴날이 없었다. 요즘 각종 이론서적들이 즐비하고 회사차원에서 하나라도
더 교육시키려고 애쓰는것을 보면 옛날생각에 가슴이 저며오기까지 한다.
특허내 상품화계획
이기장은 30년넘게 한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줄곳 제안과 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데 노력했다. 지난해 회사에서 그를 명장으로 추천할때
굵직한 공적사항만도 21개항목에 달할 정도였다.
직포1과의 인원은 그가 입사할당시 6백명선에서 현재 2백명선으로
3분의2가 줄었다. 반면 생산량은 4배이상 늘어났다. 당시 북(Shuttle)이
철커덕 철커덕거리며 왔다갔다하는 속도는 1백RPM. 그러나 지금은 5백
6백RPM의 산뜻한 에어제트(airjet)직기들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문지펀칭기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3일간 걸리던 공정을
한시간정도로 단축시키기도했다. 이 문지펀칭기는 따로 특허를내 상품화할
계획이다.
이기장의 기술이 그랬듯이 국내에서 가장 앞서있었던 제일모직의
제작수준도 세계적으로는 하위권이었다. 이기장과 그의 동료들은 그러나
혼신의 노력으로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제일모직도
그결과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할수 있었다.
스카우트제의 거절
한집건너 섬유회사일정도의 대구지역에서 그의 능력에 관한 소문은 금방
퍼졌다. 스카우트하겠다는 제의가 수없이 들어왔다. 제직업은 개인도
하기쉬운 직종이므로 때론 욕심도 생겼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기술이 모자란다는 생각도 들었고 젊음을 바친 "내직장"이 세계제일의
회사로 크는것도 보고싶었다. 깊은 마음속에는 정년을 명예롭게 마친후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내사업"을 하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최근들어 젊은 직원들이 겉보기에 그럴싸한 서비스업종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술을 배워야 경쟁시대에서 살아남을수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설득하는 이기장은 "젊은이들이 큰 포부를 갖고 기술을
배울때 우리의 미래는 밝을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육동인기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