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지난 30여년동안 세계가 놀랄만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요인은 무엇인가. 지금 또 좌절의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런 질문을 풀어야하는 것이 현재 우리앞에 부닥친 과제이다.
가발로부터 시작하여 합판 섬유 건설 전자 자동차 반도체 항공산업에
이르기까지 무엇이건 할수있다던 한국인의 돌파정신은 어디가고 피땀으로
일군 해외시장에서 후발개도국에까지 밀려나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스스로 진단하고 치유하지 않고는 한국은 세계시장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해 남다른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는 미국의
맨슈어올슨교수는 이 문제에 매우 주목할만한 지적을 하고 있다. 먼저
2차대전후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독일과 일본의 예를 들고있다. 이 두
나라는 전쟁에 패했기 때문에 종전의 제도나 구조가 대부분 제거되었다.
그리고 자유를 근간으로 한 법질서가 확립되자 기업들 또는 생산연합이
빠른 속도로 창설되고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분배상 유리한 입장을
취하려는 특정산업 직업 및 각종 단체들은 느린 속도로 출현하였다.
분배투쟁을 하는 각종 조직들이 상대적으로 자제됐기 때문에 경제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경제성장의 배경은 한국에서 일어난
한강의 기적에도 그대로 들어맞을 것이라고 올슨교수는 시사했다. 그리고
한국이 앞으로 더 큰 발전을 이룩하려면 민주화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왜냐하면 잘사는 나라는 거개가 민주화가 잘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민주화된 사회만이 신뢰할수 있는 법률과 재산권을
보호하는,진정으로 독립된 사법및 법률제도를 가질수 있고 그래야만
장기투자나 사업계획을 위한 장기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 나라의 경제발전은 자본 기술 투자등 경제변수보다도
그나라의 역사적 과정에서 진행되는 사회 전체의 변화가 더크게 좌우한다고
볼수 있다. 슘페터가 기술혁신을 발전의 동인으로 삼았지만 그것을 이끄는
주체는 기업가정신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한 사회가
발전과정에서 어떤 기업가정신과 직업윤리,그리고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느냐가 문제인 셈이다.
일.독은 계속 번영하고 있는데 한국은 겨우 발전의 중간단계에서 좌절의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도 사회구조의 잘못된 흐름 때문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경제의 효율성과 총소득에 나쁜 영향을 줄수도 있는
각종 이익집단의 활동이 경제발전단계를 앞질러서 사회적 활력을 규제하고
있다고 올슨교수식의 해석을 할수있다.
그러면 각종 이익집단이 즐비하고 분배투쟁도 만만찮은 일본과 독일은
어째서 계속 번영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회적 흐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집단을 위한 이익활동을 전개하지만 더 많은 구성원을 가진 더
큰 집단의 이익 앞에서는 소집단들이 그곳에 합류한다. 일본과 독일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경쟁력을 지닐수 있는 것은 정부 기업 노동의
공동체조직을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니얼 버스타인의 지적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기업과 기업이 싸우고 있다. 기업과 정부가 싸우고
있다. 기업과 노동이 싸우고 있다. 노동과 정부가 싸우고 있다. 경제가
주저앉고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않고 싸우고 있다. 심지어 정부와 정치가
싸울 때도 있다. 당안에서도 싸운다. 정부안에서도 싸운다. 싸움이라고
해서 꼭 나쁠것은 없지만 우리의 싸움엔 룰이 없다. 싸움에 민주절차가
없다. 힘센 쪽이 이기게 되어있다. 또한 싸움통에 일할 맛이 없어진다.
이기는 쪽 역시 이익이 돌아오므로 더 일할 필요가 없다. 결국 일보다
싸움에 열중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런 사회적 구조로 과연 내부아닌
외부와 싸울수 있는 것인가. 제2도약을 바랄수 있는 것인가.
공동체란 언제나 끈으로 다리가 묶여 있는 2인3각경기와 같다.
조심스럽게 공동보조를 맞추면서 스피드를 내야한다.
서로 묶여있는 사실을 망각하고 한쪽이 앞서 가려거나,그 앞서가는 다리에
심통이 나서 발을 걸게되면 함께 쓰러진다. 놀면서 잘 살기를 바라는
것,생산보다 부동산투기로 돈벌려는 기업과 가계,돈이 있다고 분수없이
마구 써대는 과소비,일보다 싸워서 이익을 취하려는 집단행동,옥석 다
태우는 식으로 기업을 매도하는 반기업풍조,이런 것들이 모두 달리는
다리에 발을 거는 행위나 다를바 없다. 이래가지고는 우리는 다시 뛸수
없다.
경제발전이란 결국 기업들이 주체가 되어 뛰는 것인데 반기업무드로서
발을 건다면 경제의 좌절밖에 없다. 환부가 있다면 그것은 치유의
대상이지 생명체거부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물론 기업자체가 정화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한국경제는 지금 여러가지 반경제적 요소를
증폭시키면서,발전의 환상속을 배회하면서 심하하고 있다. 뛰지 않고도
목적지에 도달할수 있다는 역설에 빠져든다.
이러한 이율배반에서 하루 속히 깨어나야 한다.
우리들이 다시 뛸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우리힘으로 조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의식의 회복이 시급하다. 수출 1백억달러를 달성했을때
우리는 모두 자기일처럼 신나했다. 그것은 공동체의식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제도 왕성했다. 지금은 수출 몇백억달러돌파쯤은 안중에 없고
남보다 큰차 타는것,큰집에 사는것,더 잘 쓰는 것에만 눈이 벌개져 있다.
이것은 공동체의식의 결여이며 경제가 구심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
흩어져서 강한 것이 없다. 경제도 예외는 아니다. 반면에 공동체의식이
강해지면 놀고 먹으려는 일,생산보다 투기를 일삼는 일,분수없이 소비하는
일,소집단이기주의가 큰흐름에서 밀려날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이 다시
뛸수 있는 조건이다.
한때 세계를 놀라게 했던 코리아의 성장을 다시 시작하여 세계를 또한번
놀라게 하려면 다시 뛸수밖에 없다. 주저앉아서는 파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