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잃어버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 이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 가슴이 떨려 말을 할
수 가 없습니다"
일제 치하 정신대로 끌려 갔었던 김학순할머니(68)는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한 맺힌 이야기를 비로소 꺼내면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회장 윤정옥)의 주선으로 자신이
정신대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기자회견이 14일 처음으로 열려 지난
46년 역사 속에 묻혀있던 정신 대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됐다.
정신대의 산증인인 김씨는 24년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다가 14세때 평양에서 양녀로 들어가게 됐다.
그후 양부를 따라 중국에 갔다가 철벽진이라는 곳에서 41년 일본
군대의 위안소에 끌려가게 됐다.
김씨는 "거기에는 한국인 여성이 5명이었는데 내가 17세로 제일 어렸고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22세였다"고 밝히면서 "군인들은 사흘에 한번씩
휴가를 나오는데 그 때에는 한 위안부가 3-4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고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전했다
김씨는 3백명 가량 되는 부대에 위안부로 있었으며 위안소는 군대앞
중국집에 설치됐다.
위안소 안에는 칸막이를 설치해 5개의 방으로 만들었고 명령에 따라
무조건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군인들은 당시 1원50전씩 내고 위안부를 찾았지만 위안부에게는 아무런
보수도 없었고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군에서 주는 쌀과 부식으로
끼니를 떼우고 지냈다. 더욱이 감시하는 여자가 있는데다 중국
최전방지역이어서 탈출할 엄두를 내기도 어려웠다는 것.
다행히 김씨는 위안부 생활 3개월여만에 한국상인을 만나 그와 함께
밤길에 위안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그 상인과 가정을 꾸리고 해방될
때까지 중국에서 지냈다.
해방후 남편과 아들, 딸 4식구가 한국에 돌아왔지만 곧바로 홍역으로
딸을 잃고 남편도 사고로 잃은 다음 장사를 하면서 지내다가 아들도
동해안에서 사고로 잃고 혼자서 지내왔다.
서울 종로구 충신동 4백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일당 1만원의 취로사업에
나가면서 근근이 살고 있는 김씨는 "일본깃발만 봐도 지난 한스런
세월때문에 가슴이 떨린다 "면서 "눈 감기전에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