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경제력집중 억제시책의 전개방향을 놓고 정부와 재계가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요즘들어 경제기획원이 경제력집중완화대책의 방향을 구체화시키는 대안을
잇따라 내놓고 있고 재계는 진의를 파악하기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편으로 항의와 호소등 양면작전으로 맞서 뜨거운 설전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하반기 경제운용계획에서 제시된 "그룹중심의 운영방식을
개별기업중심으로 전환되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 "그룹 기획조정실
해체론"으로까지 발전되면서 이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되고있다.
경제력집중 완화논의는 사실 한두번 거론된 것도 아니고 원론적인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대해서는 달리 이견이 있을수 없는 분야다. 대기업의
과다한 업무영역확장과 소유집중으로 인해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부의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다.
최각규부총리도 26일 전경련이 개최한 제주세미나에서 세계적으로
최단시일내에 산업화를 이룩하는데 대기업중심의 산업정책이 주효했지만 그
이면에 경제력집중으로 인한 문제가 누적돼왔고 기업들 스스로의 노력이
정부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당초 적정한 투자규모를 확보하고 자금동원력을 극대화시키기위해
대기업을 지원했으나 정부의 지원을 업고 성장한 뒤에도 소유를 분산시키지
않아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또 제조업분야에서
업종전문화를 추구하리라던 기대와는 달리 업종을 늘려나가 산업정책추진
방향에도 역행하고 있을뿐 아니라 중소기업이 맡아야할 부품산업까지
잠식,구조적인 불균형을 야기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함께 외형을
팽창시키는 과정에서 상호지급보증이나 상호출자라는 불건전한 방식을
동원함으로써 특정 계열기업이 부실해지면 전체그룹이 휘청거리는 상황이
됐고 무리한 투자로 만성적인 자금초과수요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들고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차입금이나 가공자본형성을 통한 대기업의
영토확장을 견제하고 동시에 노력없이 재산을 대물림하는 풍토를
시정하겠다는 것이다. 즉 계열기업간의 상호출자나 능력을 넘는 과다한
타회사출자,그룹계열사간의 불공정한 거래행위,대기업의 지위를 남용한
횡포등을 철저히 규제하고 상속.증여세과세행정을 강화해 경제력집중을
억제해 나가겠다고 강조하하고 있다.
이같은 논의나 대안들은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거론돼왔고 또 지금도
추진중에 있는 것들이다. 기업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적응하고
있고 공감대가 형성돼있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경제력집중억제문제가 새삼스럽게 논쟁거리로 떠오른 것은
바로 "그룹기조실체제 전환방침"때문이다. 취지는 간단하다. 자금과
인력등을 그룹집중방식으로 관리함으로써 독립경영체제가 정착되지 못하고
전문성과 창의성을 제약하기때문에 개별기업중심으로 전환돼야한다는
것이다.
외형상의 논리로는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기업들의 반응은 이같은
교과서적 당위론에 그치지 않고있다. 정부가 경제력집중 억제를 내세워
"비서실"이나 "그룹기조실"로 불리고있는 기업의 사령탑을 해체시키려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그룹기조실은 정부로치면 청와대비서실이나
경제기획원과 같은 조직으로 최고경영자의 의사를 전달하는 중추기구인데
이를 해체시키겠다는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재계는
경영방식을 정부에서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기업스스로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있고 26일 열린 제주세미나에서도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작 발설원인 경제기획원측은 "어디까지나 장기적으로 기업이
추구해야할 방향을 강조한 것일뿐 경영체제전환시기나 방식은 기업들이
자기혁신을 통해 결정할 문제"라며 원론적인 당위성 수준을 넘지않고있다.
최부총리도 이날 강연후 기자들과만나 "결코 충격적인 조치나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며 기조실해체는 검토한 바 없다"고 분명히하고
있다.
실제로 당초엔 상당한 의지를 갖고 기조실집중체제 개편방안을 구상했으나
대기업들의 반발로 유야무야됐고 현재로서는 경제기획원도 별다른 복안을
구상하지 않고있는 사실이 확인되고있다. 항간에는 기업스스로
기조실감축을 추진하고 있으나 더욱 가속화시키도록 부담을 주기위해
"여론환기용"으로 던져본 방침이라는 분석이 있기도 하다. 최부총리
자신도 "대기업들이 이같은 정부방침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며
정부로서도 바라는 바"라고 밝혀 실제추진의사보다는 "재촉용"으로 썼다는
소문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이 일단 불이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다는게 재계의 관측이다. 그동안 별도의 대책은 없다는 뜻을 여러차례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제주강연에서 또다시 "개별기업의 독립성과
책임경영체제를 저해하는 잘못된 관행은시정돼야한다"고 강한 톤으로
강조했고 "금융기관이 상호지급보증을 요구하는 일이 없어야한다"며
수단까지 제시함으로써 의문의 소지를 남겨놓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동안의 경과로 볼때 "기조실해체론"은 일단 캐비넷속으로
들어간게 틀림없다. 애당초부터 실천의지가 없었건,압력에 못이겨 중도에
퇴색했건간에 일단 정부주도개편방침은 "장기적 구상"으로 변색돼가고
있다.
그러나 기업측의 부담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정부가 문제를 제시하고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할 사항이라며 기업측에 바통을 넘겨버림으로써
기업측의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고 볼수있다. 또 기업들의 자발적인 개편이
지지부진할 경우 캐비넷속에 들어가있던 이문제가 다시 재론될 가능성도
없지않다.
이제 남은 문제는 기업스스로 불합리한 경영요소를 도려내고
국민으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할수 있도록 얼마나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추구하느냐에 달려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