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 개각 6공들어 최대규모 ***
<3.17개각>은 지난 88년 2월25일 노태우대통령의 제6공화국이 출범한 이래
6번째의 정부개편이다.
노대통령은 취임에 앞서 88년 2월19일 발표된 조각에서 총리에 이현재서울
대총장, 부총리에 나웅배상공부장관을 임명하는등 각료 25명중 최광수외무/
이상희내무/사공 재무/정해창법무/김상호체육/최동섭건설/오명체신등
5공화국에서 임명됐던 각료 7명과 공석의 정무제1장관을 제외한 17명을 새
얼굴로 바꾸어 6공화국 정부를 발족시켰다.
당시 노대통령은 야당측의 거부로 야당인사의 기용이라는 선거공약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학계 5명, 관계 11명, 정계 3명, 여성계 2명, 문화예술계
1명, 업계 1명등을 해당 분야에 발탁, 기용함으로써 전문성을 중시했으며,
첫 내각은 새정부를 정착시키는데 주안점을 둔 과도성격의 실무형으로 평가
됐다.
새 내각 출범과 함께 대통령비서실 기구도 일부 개편돼 10개의 수석비서관
실을 7개로 줄이고 정무에 최병렬의원, 행정에 이연택 총리실행정조정관,
경제에 박승중앙대대학원장, 의전에 노창희외무부본부대사, 공보에 이수정
문화방송전무등 5명을 1차로 임명했다.
노대통령은 이어 2개월여만인 5월7일 안무현안전기획부장과 이상희내무를
경질, 후임에 이춘구민정당 전사무총장과 배명인전법무장관을 각각 임명하는
첫번째 개각을 단행했다.
이 개각은 비록 2명의 각료를 바꾸는데 불과했으나 "13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뒤 국적을 더욱 원활하게 수행하고 긴밀한 당정협조를 통해 정부가
일하는 체제를 갖춘다"는 정부 발표에서도 비쳤듯이 13대의원선거에서의
민정당 패배에 대한 인책과 서올올림픽을 앞둔 점검, 그리고 올림픽후 지방
자치제실시와 중간평가라는 최대의 과제에 대비하는 성격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총리의 내각은 같은해 12월5일 단행될 전면개각으로 단명으로 끝났다.
이때 현재의 강영훈총리가 임명되고 조순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최호중
외무/이한동내무/이규성재무/허형구법무/이상훈국방/정원식문교/김집체육/
김식농림수산/한승수상공/박승건설/문태준보사/장영철노동/김창근교통/최영철
체신/최병령문공/이상의과기처/이종택정무1/김영정정무2장관과 이상연보훈
처장등 정부 25개부처중 동자/총무처/통일원/법제처를 제외한 21개부처장과
안기장/서울시장등이 경질돼 사실상 조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노대통령은 5공화국의 색깔을 벗어나기 위해 고심하면서 중간평가를
의식, 정치력을 대폭 보강한 흔적이 엿보였으나 지역안배등 과거의 패턴과
큰 차이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집권 2년째인 89년 들어서는 3월16일 예기치 않았던 김용갑 총무처장관의
사퇴로 김용래전서울시장이 후임장관에 임명됐고 7월19일에는 국가안전기획
부장에 서동권전검찰총장을 임명하고 내무부장관에 김태호민정당의원을
기용하는등 안기부장과 6부장관을 바꾸는 내각개편을 단행했다.
이 개각에서 권영각건설/김종인보사/최영철노동/이우신제신/박철언정무
1장관이 기용돼 공안과 민생치안의 문제점, 정책입안및 수행의 차질과
관련한 관계장관 문책성이 강한 개각으로 풀이됐으며 박철언대통령정책
보좌관이 여러차례의 의사표시끝에 당정협조를 본연의 임무로 하는 정무제
1장관 자리로 입각함으로써 6개월후의 3당통합 주역을 위한 정치작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노대통령은 이어 작년 12월27일 문공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되고
환경청이 환경처로 격상됨에 따라 보각성격의 5차개각을 단행, 이어령문화/
조경식환경처/최병렬공보처장관을 임명했다.
따라서 17일의 개각은 제6공화국의 6차 정부개편으로, 조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각료와 내무/법무등 민생치안관련부처의 장관들을 거의 전원 교체하는
6공들어 최대규모로 단행했다.
정계개편이후 처음으로 단행된 3.17개각은 특히 강보성 김정수 이희일씨등
야당출신의 민자당의원 3명이 입각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연립>성격을 가미한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지적되고 있다.
노대통령의 3.17개각과 함께 청와대 비서실도 개편, 통일원장관으로 입각한
홍성철비서실장의 후임에 노재봉정치담당특보, 정치담당특보에 이홍구통일원
장관을 임명하는등 비서실도 대폭적인 수술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