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의 경오년 말띠의 해.
육십간지중에는 경오년 외에도 무오, 임오, 갑오등 말의 해가 다섯이나
있으나 옛날사람들은 이 가운데 무오년의 말의 해를 가장 좋아했다.
이는 무자가 무성의 무와 그 음이 같을뿐 아니라 실제 무성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말을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 말띠 해에 태어나면 남녀
모두 천복을 타고 나 의식주가 넉넉하고 관운이 있으며 지금도 민가에서는
말(오)날을 택해 혼례를 올리거나 장을 담그기도 한다.
말은 또 그쓰임새가 다양해 고대의 경우 사람이 타고 다니는 것은 물론
짐을 운반하거나 우편물을 먼곳으로 수송하며 특히 전쟁중에는 무기와
다름없는 요소로 사용됐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말에 대한 기록은 삼십육국춘추에 "남연왕 때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천리마를 바치다"고 적혀있고 구당서에는 "당의
개원11년에 신라왕 흥광 (성덕왕)이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를 바치다"라고
쓰여있다.
그림으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말을 타고 가는 그림 (안악 3호 고분/
동수묘)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수렵도 (쌍영총/사신도 /무용총) 그리고
자작나무 껍질에 채색으로 그려진 신마도(신라고분 155호 출토)등이 좋은
본보기.
한국역사에서 왕과 관련되어 처음 나오는 신마 이야기는 고구려 대무신왕
3년 (서기 20년)에 등장한다.
사냥터인 골내천에서 신마를 얻은 왕이 얼마후 부여국을 토벌할때 적군
에게 포위당하는 바람에 신마를 잃어버렸는데 석달후에 신마가 부여국의
말 100여필을 끌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 신라의 시조인 박 혁거세의 탄생 설화로서 고허촌 촌장인 소벌공이
하루는 양산 밑 나정 우물 곁에 있는 숲 사이를 바라보니 이상한 빛이
하늘로 부터 드리워져있는데 그 빛속에 백마 한마리가 무릎을 끓고 울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보니 그 말은 간곳이 없고 불그스름한 큰 알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알속에서 어린 사내아이가 태어나 나중에 신라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말에 대한 일화로는 임경업장군이 김자점의 명을 받아 형리의 곤장을
맞아 죽자 마부가 그의 준마를 가리키며 "짐승은 무지하니 그 주인이
죽은 줄도 모른다"는 말을 했더니 준마는 그말을 알아들은듯 먹는 것을
딱 그치고 큰소리를 한번 지르더니 피를 토하며 죽었다는 것이다.
백제 말엽,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부여 부근의 강에서 백마를 미끼로
어룡을 낚았다 하여 뒷날 그강의 이름을 "백마강"이라 불렀다는 것도 말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시대에는 말을 타고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격구라는 경기가
성해했고 조선조에 와서는 무료 무취의 한 과목이 되기도 했다.
고려 예정때는 왕이 격구를 친히 보고 물자를 내리기까지 했으며 서경에
거동하였을때는 왕을 환영하는 뜻으로 부녀자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격구를
하기도 했다는 것.
조조에는 또 각 영문의 마군 (지금의 기마대) 가운데서 행하는 "마상재"
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단마 혹은 쌍마를 타고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가지
재주를 피우는 것으로 모두 여덟가지가 있었다.
이에대한 인기가 대단하여 일본가는 통신사의 일행에도 으례 2인 이상의
마상재인이 따라가서 실연을 했다 한다.
동의보감을 보면 말고기는 여성들의 피부미용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당뇨병과 빈혈치료에도 효력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말 연구가인 역사학회 회원 김상조씨는 "조선시대에는 제주도에 목장을
세워 궁중에서 먹을 공마를 기르기도 했다"면서 특히 백말은 양기를
북돋운다 하여 왕실은 물론 민가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전한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말은 버릴 곳이 없는 유용한 동물이다.
고기는 요리를 해 먹을수 있고 뼈는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하여 한약방
에서, 가죽은 모피회사에서 각각 사들여 나름대로 활용하고있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나면 제주로 보낸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 말의 본고장은 제주도다.
제주에는 지금 키가 1.1m까지 자리며 몸길이가 짭은 조랑말이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어 국내외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