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Theo Cote
사진=Theo Cote
“리디아 데이비스는 자신이 발명한 문학 형식의 대가다.”

2009년 미국 소설가 리디아 데이비스(76)의 작품집(The Collected Stories of Lydia Davis)이 출간되자 비평가 크레이그 모건 테이처는 신문에 이런 글을 실었다. 데이비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라는, 독보적 문학세계를 구축했다는 극찬이었다. 4년 뒤 데이비스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당시 명칭은 맨부커 국제상)을 받자 이 비평은 데이비스의 작품세계를 요약한 문장으로 다시금 주목받았다.

문학 애호가들이 원서를 구해 읽던 이 작품집이 <불안의 변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출간됐다. 데이비스가 1986년부터 2007년까지 발표한 네 권의 작품집을 집대성한 것으로, 데이비스가 30대부터 60대까지 쓴 글이 담겨 있다.

데이비스의 단독 저서가 국내에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다른 작가들과 함께한 작품집으로 데이비스의 조각 글을 접했던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살펴볼 길이 열린 셈이다. <불안의 변이>는 원서에 수록된 200여 편 중 102편을 엄선해 옮겼다.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 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들다. 오죽하면 영국 신문 ‘가디언’이 “범주에 넣기 불가능한 작가”라고 했을까. 시에 가까운 몇 행짜리 글부터 위문편지를 연구한 보고서(‘보고 싶다’), 흔히 생각하는 단편소설까지. 길이와 형식을 종잡을 수 없는 작품들이 책을 채우고 있다. 수록작 중 ‘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의 본문은 딱 한 줄이다. “스코틀랜드에 나무가 그토록 적다는 것에.” 데이비스는 자신의 작품들을 소설이나 시 또는 에세이란 단어에 가두기보다는 ‘이야기’로 칭한다.

[책마을] '그 자체로 장르'인 작가의 30년이 담긴 한 권
때로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마저 넘나든다. 1974년 데이비스는 <뉴욕 3부작>을 쓴 저명한 소설가 폴 오스터와 결혼했고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1981년에 이혼했다. 전남편에게 보낸 아들에게 전화를 걸며 복잡한 감상에 사로잡히는 ‘시골에 사는 아내1’의 화자는 데이비스의 실제 삶과 겹쳐 보이는데, 데이비스 역시 이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닐 것이다.

데이비스는 언어와 문학에 대한 도전을 지속한다. 법정에서의 문답을 정리하면서 질문을 공란으로 처리한 ‘배심원 의무’, 딸꾹질하면서 하는 말을 받아적은 것처럼 의도적으로 띄어쓰기 법칙을 흐트러뜨린 ‘(딸꾹질하는) 구술 기록’ 등은 언어와 문학의 정의에 의문을 던진다.

물론, 이런 형식적 새로움이 데이비스 문학의 전부는 아니다. 낯선 형식은 이야기의 주제와 효과적으로 결합할 때 가치가 빛난다. 예컨대 ‘어떻게 그들을 애도할까?’는 겉보기에 질문의 나열이다. “L처럼, 집을 잘 정돈할까?”로 시작된 글은 “C처럼, 밤에 침대에 누워 탐정소설을 읽을까?” 등 사소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통해 망자의 빈 자리를 확인한다. 글을 읽고 나면 누구든 이 질문들에 답을 내놓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애도의 자리는 도처에 널려 있고, 그래서 완벽한 애도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짧은 글로도 강렬한 감각과 긴 여운을 선사한다. 부커상 수상 당시 심사위원들이 “놀랍도록 적은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큰 성취를 남긴다”고 평가한 이유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