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부터 서울 회현 지하상가에서 밀리터리 빈티지를 판매해온 멤피스벨.
1997년부터 서울 회현 지하상가에서 밀리터리 빈티지를 판매해온 멤피스벨.
1990년대 서울 명동 일대 지하상가에는 신기한 물건을 파는 가게가 참 많았다. 예전 대통령들의 사진이 들어간 귀해 보이는 우표와 옛 동전들로 가득한 가게, 페도라를 쓴 멋쟁이 아저씨들로 가득한 LP 가게, 과연 사진은 찍힐까 싶은 오래된 카메라가 빼곡히 진열된 가게까지. 옛 기억 속 장소 중엔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들이 있다. 나에게 명동과 회현 일대 지하상가는 타임캡슐과 같다. 그 안에 남자들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일깨우는 네 평 남짓한 공간이 있다. 27년간 그 자리를 지켜온 밀리터리 패션&빈티지숍 ‘멤피스벨’이다.

‘의정부 키즈’ 밀리터리룩에 빠지다

김영식 대표
김영식 대표
50대 중반의 김영식 대표는 의정부 토박이다. 부모님이 미군 캠프에 근무해 세 살 무렵부터 미군부대로 매일 같이 출근하게 됐다고. 당시 의정부 시내 비포장도로를 지나 캠프 입구에 들어서면 거기서부턴 다른 세계인 미국 땅이었다고 한다. 포장된 도로에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자판기엔 젤리와 초콜릿이 가득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31가지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었다. 미국 본토에서 영화와 음반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고 살 수 있는 곳이 의정부 미군부대 캠프였고, 라디오와 TV를 켜면 미국 방송을 언제든 들을 수 있었던 AFKN 방송 권역이었다. 주변 중·고등학교 도서관에 가면 미군이 기증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라이프 등 진귀한 잡지와 책들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 시절 경험과 기억이 그에겐 좋은 양분이 됐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수품 회사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미국 그리고 밀리터리에 대한 기억들이 그곳으로 이끌었을지 모른다. 1990년대 초 출장으로 일본에 가게 됐는데 군수품을 판매하는 서플라이 숍들이 대단히 큰 규모로 운영되며 대유행을 이끌고 있는 걸 봤다. 오리지널 밀리터리 제품을 현대식으로 해석하고 복각해 판매하는 아비렉스, 알파, 지금은 사라진 휴스톤 같은 많은 밀리터리 패션 브랜드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것들이 되겠다 싶은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고 1세대 밀리터리 빈티지 패션숍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1997년 독립해 차린 회사가 멤피스벨이다.

멤피스벨,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곳

멤피스벨이 한정판 에디션으로 만드는 헬멧백과 가방들.
멤피스벨이 한정판 에디션으로 만드는 헬멧백과 가방들.
멤피스벨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익숙하게 느껴졌다면, 아마 영화 ‘멤피스벨’을 본 사람일 것이다. 1991년 제작된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유럽에 있었던 B-17 폭격기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어린 시절 미군부대에서 수직 이착륙하던 전투기 헤리어,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잠자리 헬기를 보고 자란 그로선 이 영화가 마음에 깊이 박혔던 게 당연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밀리터리 빈티지 패션숍의 이름도 멤피스벨이 됐다.

멤피스벨에선 밀리터리 제품을 팔지만 그것만 다루는 건 아니다. 처음부터 밀리터리를 군 보급품이 아니라 ‘패션’의 기본 장르라고 생각하고 가게를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관이 되는 아웃도어, 라이더, 워크웨어 브랜드 중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을 골라 판매해왔다. 가끔 연세가 있는 어르신들이 추억 때문인지 위아래 군복을 구하러 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파는 곳이 아니라고 정중히 말씀드리기도 한다. 1990년대 말 일본 영화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주인공이 입어 화제가 된 ‘M-51 피시테일 파카’는 이후 멤피스벨에서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밀리터리 업사이클링

초창기 밀리터리 빈티지 제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마음 한쪽에 해소되지 않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밀리터리 업사이클링이다. 밀리터리 업사이클링이라 하면 약간 생소할 수도 있겠다. 어느 나라 군대든지 군은 어마어마한 물자를 대량 생산하고 보관한다. 유사시 전쟁이 발발하면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효기한이 되면 파기 또는 폐기해야 할 시점도 반드시 온다. 기술적으로 진보한 원단이나 봉제기술이 나와 더 나은 제품이 개발되면 이전의 물자들은 쓸모가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 걸 받아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것이 밀리터리 업사이클링이다. 유럽이나 일본은 튼튼하고 실용적인 군수품 소재들을 해체하거나 재조합해 만든 제품이 각광받은 지 꽤 됐다. 그래서 초기에는 밀리터리 업사이클링 제품을 수입해 판매했다. 그러다 결국은 직접 제작까지 하게 됐다.

첫 아이템은 파일럿 헬멧백이었다. 헬멧백은 미군에서 사용하던 토트백 형태의 헬멧을 수납하는 가방이다. 오래된 군수 텐트 원단과 군용 지퍼 등 모든 군수용 부자재를 구해 과거의 제조 방식과 오리지널 제품의 특징을 살려 구현했다. 당시 60개를 만들어 홍대와 이태원 유명 편집매장에 위탁 판매했는데, 2주 만에 완판됐다. 2차로 70~80개 선주문을 받았는데 역시 한 달 만에 전부 다 팔렸다. 그때부터 1년에 1, 2개씩 꾸준히 제품을 제작해오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인 ‘THE 25CMP’의 기원도 멤피스벨에 있다. 멤피스벨은 당시 영국에서 도버 해를 건너 유럽 나치 점령지를 포격하는 미8공군 소속 B-17폭격기의 애칭이다. 바다를 건너간 100대의 폭격기는 대부분 격추당하거나 반파돼 20대 정도만 돌아오는 힘든 미션. 영화는 총 25회의 폭격 미션에 성공하면 원하는 곳으로 배치해주겠다는 약속을 위해 목숨을 걸고 비행기를 타는 조종사들의 용기와 우정을 그린다. 최초로 이 미션을 성공한 폭격기의 실화가 스토리의 큰 줄기다. 김 대표는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다. 블로그를 통해 25번의 제품을 디자인해 출시해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고, 이 프로젝트는 13회차를 넘겼다.

한정판 빈티지에 ‘대를 잇는 단골’ 열광

요즘 나오는 신소재 원단들은 너무 기술이 발달해 원단이 해어지거나 빛이 좀처럼 바래지 않는다. 페이딩(낡게 만드는) 작업이 불가하다. 하지만 1960~198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제작된 원단들은 정말 질기고 탄탄하면서도 오래될수록 특유의 물빠짐과 주름이 배어 나온다. 오리지널에 도장을 찍는 듯한 스텐실 작업도 과거의 기법과 염료, 도구를 사용해 전부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커다란 키트백엔 나만의 영문 이니셜도 새길 수 있다. 실제 미군에서 사용하던 도구를 사용한다.

멤피스벨에서 만드는 이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는 제품별로 소량 생산하기 때문에 모두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넘버링된다. 최대 100개 이상은 안 만드는데, 헬멧백은 한 종류만 몇 가지 버전으로 700여 개를 제작했다.

27년째 외길을 걷다 보니 그에겐 단골이 정말 많다. 20년 전 아버지를 따라와 같이 구경하던 초등학생들이 이제 커서 대를 이어 고객이 됐다. 유럽에서 셰프가 돼 인사하러 온 옛 꼬마 고객도 있단다. 국내 대학원생이 밀리터리 패션에 관련한 논문을 쓰는 데 자료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국은 리얼맥코이나 아비렉스와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어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직접 겪은 경험과 역사를 지녔고, 일본 복각 제품의 생산 기지일 만큼 뛰어난 인프라와 좋은 기술을 갖고 있지요. 시대별 명품 전투복을 제대로 복각하는 국내 브랜드와 함께 지속가능한 업사이클링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지승렬 패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