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비평가, 이 두 사람!
데미안 허스트. ⓒOli Scarff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는 전 세계가 ‘리먼 사태’로 공황 상태에 빠져드는 2008년 9월 15일과 16일, 미술품 구매의 문턱을 낮추고, 부조리한 미술시장 구조에 도발한다는 명목으로 1차 시장인 화랑을 거치지 않은 채, 소더비 경매에서 자신의 작품들만으로 된 단독경매를 열어 218점(총 2283억원어치)을 모두 팔아치웠다. <황금 송아지>는 184억 원에, <왕국>은 170억 원에 낙찰되었다. 작가뿐 아니라 경매사도 크게 한 몫 챙긴 셈이다. 소더비로서는 횡재를 한 셈이 아닌가. 작가가 단독으로 주도한 이 경매는 예술과 세상의 관계 설정 측면에서 현대미술의 태도 변화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진정한 예술은 결국 예술과 세계와의 관계를 수립하는 방식이 아니던가.

‘명민하게도’ 허스트는 예술만큼 예술이 시장화되고, 가치와 독립적으로 가격이 형성되는 비합리적인 과정을 예의주시했다. 허스트가 보기에 현 미술시장 체제는 작가의 작품을 헐값에 사고 되팔아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는’ 체제로 보았다. 작가는 구조적으로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도록 내모는 체제. 미술품 거래로 부당하게 수익을 올리는 갤러리나 콜렉터의 수익의 일부를 ‘자기 몫’으로 챙기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대안보다는 계산에 가까운 대응이었다. 자신의 작품들을 1차 시장에서 조금 더 비싼 가격으로 팔려는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2차 시장에서 발생하는 수익에까지 적극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갤러리 마진’을 생략하고 경매로 고고씽! 2008년 런던 소더비에서의 경매가 그것이었다.

헌데 어떻게 해서 이것이 부조리한 미술시장 체계에 한 방 날린 반체제주의적이고 악동(惡童)적인 도발이 되는가? 대체 이 악동 예술가가 어떤 체제에 도발을 감행했다는 것인가? 그에게 터너상을 안기고, ‘미술계 파워 100인’에서 1위에 오르도록 하고,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셀럽 예술가로 키워준, 그의 후원자들이 넘쳐나는 런던 미술계에 대해 그렇게 했다는 것인가? 예술가와 배팅에 능한 마케팅 전문가 사이의 구분을 작가 스스로 추방하는 것이 그렇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행실 좋은 모범생의 전형에 가까울 것이다. 어불성설이다. 상업적인 이해관계를 따르는 계산, 어떤 문제적 상황에서도 문제를 주주들의 순이익에 순치하도록 전환시키는 접근이 도발로 기술되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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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계는 반체제주의로 유지되는 체계다. 반체제주의를 내세워 반체제적 사유의 씨앗까지 털어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체제다. 맨하튼의 팬트하우스나 플로리다 주 델레이비치에 있는 백만장자의 호화별장에 전시되기 위해 수백만 달러에 거래되는 것들을 여전히 전위주의라고 명명하는 뻔뻔하고 위선적인 체제다. 데이미언 허스트라는 상품을 설계하고 실현한 바로 그 체제다. 허스트가 그 체제에 자해적으로 도발한다고? 어불성설이다. 이 체제는 예컨대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부착하는 식으로 언어적 혼동전략을 구사한다. 진실을 흐리는 언어의 혼동, 이것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이 체제의 성공적인 기법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으뜸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크 엘륄이 소상히 다룬 바 있다.
“예술가는 자유롭거나 반체제적이기는커녕 근대이론에 의해 결정되고 기술체계를 표현한다. 예술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그것은 자유를 증언하는 반체제적인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의 본연의 기능은 대중을 소비의 종교에 적응시키는 데 있다.” (자크 엘륄, 『자크 엘륄- 대화의 사상』, 임형권 옮김(대전: 대장간, 2011) p.84.)

런던의 악동 예술가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 사람들은 이 특별한 소비의 종교의 교리에 이미 봉헌되었다. 허스트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비유적으로 ‘사이비 종교의 교주’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정말로 그 종교의 신도가 되고 싶어한다. 2021년 《화폐(The Currency)》전에서 그-허스트는-는 자신의 점 회화(spot painting) 1만여 점을 NFT로 만들어 함께 팔았다. 친히 원본을 불태움으로써 예술 행위의 최종 목적이 ‘큰돈을 들여 더 큰돈을 벌어들이려는’ 구매자의 자산 증식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랄까. 원본을 없애야 NFT가 원본이 될테니까.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는 예술의 이러한 행보를 잘 들여다 보도록 하는 렌즈로서 믿음과 계산의 관계에 대해 밝힌 바 있다. 틸리히에 의하면 특정한 정신의 상태로서, 그 과정의 결정적인 속성이 ‘계산’이 되는 정신은 실은 ‘믿음이 고갈된’ 단계에 이르러 나타난다. 계산은 진정한 믿음이 바닥을 드러낼 때 나타나는 사유의 강직이다. 이 강직, 이 좀비화는 맹신에 의해 포장된다. 유일하게 계산을 허용하는 믿음의 형태가 바로 맹신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대하는 작금의 태도가 이 맹신에 매우 근접해 있다. 맹신은 진정한 믿음의 성격을 가진 무한한 열정의 증발로서, 그것을 둘러싼 어떤 공격과도 맞서 싸울 수 없는 겉모습뿐인 계산만이 남은 상태다.

사실 신도들도 그들이 원하는 천국을 담보받고 싶어하는, 예술가만큼이나 계산이 빠른 사람들이다. 한가지, 엘륄이 말한 “작가가 결코 깨닫지 못하는 노예 상태에의 종속”을 정말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비유더라도 ‘교주’는 부적절해 보인다. 자신은 잘 깨닫지 못하는 노예상태는 이 종교에서 차지하는 몫이 적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등장인물인 비평가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한번 더 엘륄을 청해 듣자.
“비평가는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전문가다. 실상 의미가 없음을 주장하는 순수한 형태 속에서 말이다. 그는 기술체계의 대표적인 추종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작품의 이해를 하나의 기술로 만들고, 또 기술자처럼 그는 순 재료로 여겨지는 예술작품에 최고의 효율성, 즉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 비평가는 작품의 명시적 의미의 부재를 분명한 규칙들의 틀과, 예술과 언어의 형이상학으로 대체한다. ... 인간 안에 이 현실을 침투시키고 그것에 인간을 깊숙이 통합시킨다. 비평가는 철저하고 근본적인 순응화의 도구이다.” (앞의 책,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