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유령들의 연애담
고3 겨울에 서른 명쯤 되는 1학기 수시 전형 합격자만 불러서 선배들이 단과대 모임을 연 적이 있다. 그곳엔 북한 이주민 전형으로 들어온 서너 명의 학생도 있었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했는데 보통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왔다고 했고, 모두 남자였으며 나이는 이십대부터 삼십대까지 다양했다.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유일한 또래의 남학생과 뒤풀이 자리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너도 강을 건너왔느냐고 묻자 황당하다는 듯 중국을 경유해 비행기로 왔다고 했다. 북한 이주민도 각자 사정이 많이 다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각기 다른 배경과 이유로 남한에 닿은 이들은 학교에 적응하는 속도도 다 달랐다. 씁쓸했고, 이념적 공산주의와 현실 공산사회의 간격에 대해서 실감하게 되기도 했다.

내가 특별히 북한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평소 탈북자에 관한 책을 찾아 읽는 편은 아니었다.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읽기 어렵다. 대체로 굉장히 자극적인 탈출 서사와 한국 사회에서의 간난신고에 집중되어 있거나, 혹은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다가 자유를 찾으러 온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경우도 허다하다. 나의 소홀과 무지 때문에 좋은 책을 못 찾은 것도 분명 큰 이유이겠지만, 읽기 불편하다고 생각해온 것이 사실이다.
논픽션: 유령들의 연애담
내게 ‘와!’ 하는 감탄을 종종 뽑아내는 호러소설 작가 김이삭이 〈북한 이주민과 함께 삽니다〉라는 에세이를 냈을 때, 호기심으로 열어본 이 책을 나는 하루 만에 읽어버렸다.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의 가시적 시스템과 비가시적 문화가 어떻게 북한 이주민을 대상화하고 일상에서 지워버리는지, 존재하는 이들을 어떻게 유령으로 만드는지, 소소한 사건들로 구체화한다.


“한국에 사는 북한 이주민이 평범한 남한 사람보다 더 잘사는 것 같아.”
[……]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생각보다 자주 듣는다) 속으로 하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래서 북한 이주민과 신분을 바꿀 수 있다면, 당신을 바꾸겠는가?’ 아마 그러겠다고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사랑의 힘이었을까?〉에서)


북한 출신 남성과 남한 출신 여성이 연애하고 가족을 이루는 여정에서 단순히 한쪽으로 기운 시소를 조명하지도 않는다. 젠더 불평등, 나이 권력, 한부모 가정, 병역, 취업, 임금 노동과 가사 노동 등 다양한 소재가 엮이며 여러 사람의 역사가 얽히고, 소수자성이 충돌한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함경북도 출신이라는 사실보다는 술버릇이 고약하다는 게 더 걱정이던 저자는 그의 삶을 지배하는 정체성의 큰 부분이 북한 이주민이라는 것을 그와 공유하는 시간 속에서 하나씩 인지해가면서도, 그것만으로 정의될 수 없는 개인으로서의 애인을 발견해간다. 무척이나 코믹하고 진솔하게 서술된 이 산문집은 귀여운 연애담을 읽는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북한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오늘을 감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