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의 몽환적 포스터…파리의 아름다운 시절 그 자체였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전유신의 벨 에포크
'체코 국민화가' 알폰스 무하
1894년 말 프랑스 국민배우 연극 포스터 제작
사람들 열광…2m 포스터 너도나도 떼가기도
여성·꽃·패턴 '무하 스타일' 유럽·미국서 인기
'체코 국민화가' 알폰스 무하
1894년 말 프랑스 국민배우 연극 포스터 제작
사람들 열광…2m 포스터 너도나도 떼가기도
여성·꽃·패턴 '무하 스타일' 유럽·미국서 인기
‘벨 에포크’는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정치적 안정, 경제적 풍요, 문화의 부흥을 경험한 프랑스의 상황을 지칭하기도 한다. 벨 에포크가 전개된 주요 무대는 근대화된 파리였다.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대대적인 도시 재건 사업으로 파리는 낡은 중세식 도시에서 오늘날과 거의 흡사한 모습의 근대적인 대도시로 변모했다. ‘빛의 도시’로 불리며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꿈의 공간이 된 파리에서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도 시작됐다.
벨 에포크 시기의 파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다면 근대화된 파리와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그린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된다. 만약 아름다운 시절이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꿈과 환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때 찾아봐야 할 작가는 단연 알폰스 무하(1860~1939)다.
무명의 외국인 작가였던 무하의 삶을 하루아침에 뒤바꾼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1894년 말이다. 프랑스의 국민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을 맡은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 디자인을 맡게 된 것이다. 베르나르는 공연 기간 연장을 알리는 포스터 제작을 원했지만 마침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라 일할 디자이너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자신의 일러스트를 잡지에 연재한 경력도 있고 생계를 위해 연휴에도 일거리를 마다하지 않던 무하를 소개받아 급히 포스터 제작을 맡겼다. 포스터 속의 베르나르는 금박 장식으로 뒤덮인 비잔틴 귀족의 의상을 입은 채로 연극의 소품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난초 화관을 쓴 베르나르의 머리 위로는 후광처럼 보이는 아치를 그려 넣어 관람자들의 시선이 주인공의 얼굴로 향하게 했다.
포스터의 상단과 하단에 배치한 연극 제목과 극장의 이름도 비잔틴 모자이크 타일처럼 장식했다. ‘여신 사라’로 불린 베르나르의 화려하고도 우아한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이 포스터는 등장과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포스터 디자인에 열광한 사람들이 무려 2m가 넘는 크기로 제작된 거대한 포스터를 떼어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할 정도였다. 지스몬다 포스터는 이후로 몇천 부가 더 인쇄돼 배포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 포스터 덕분에 무하는 6년간 베르나르의 전속 디자이너로 일했고, 각종 유명 브랜드의 광고 디자인을 도맡게 됐다.
여신처럼 보이는 여성을 중앙에 배치한 뒤 꽃과 식물의 곡선과 패턴을 이용해 장식하고 파스텔 톤으로 채색한 그의 작품은 ‘무하 스타일’ 또는 ‘아르 누보의 상징’으로 불리며 유럽 각지와 미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무하는 1910년, 미술의 수도 파리에서 이룬 엄청난 성공을 뒤로하고 고향 체코로 돌아갔다. 20대 초부터 꿈꿔온 역사화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무하는 체코의 독립을 염원하는 역사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고국의 독립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의 염원대로 체코는 결국 1918년 독립했지만, 1939년 나치 정부에 의해 다시 프라하가 점령당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나치에게 체코인의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반영된 무하의 역사화는 탐탁지 않은 대상이었다.
결국 무하는 나치에 체포돼 조사받으며 고초를 겪었고, 후유증으로 폐렴을 앓다가 몇 달 뒤 사망했다. 체코에서 무하 스타일이 다소 올드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의 역사화는 나치의 표적으로 인식되던 1930년대, 무하를 다시 기억해낸 것은 파리였다. 1936년 파리의 주 드 폼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은 대규모 역사화인 ‘슬라브 서사시’를 포함한 139점의 작품이 전시된 무하의 대규모 회고전이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고향인 체코 못지않게 무하의 전시가 자주 열리는 곳도 바로 파리다. 2018년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이 큰 화제를 모은 데 이어 올해 3월부터 파리의 그랑 팔레 이메르시프에서도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 ‘영원한 무하’전이 열리고 있다.
무하의 작품은 벨 에포크 시기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파리의 미술관들이 무하의 전시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무하는 외국인 미술가들에게도 개방적이고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던 과거의 미술 중심지 파리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작가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하는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이 여전히 현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작가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무하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 영원히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벨 에포크 시기의 파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다면 근대화된 파리와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그린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된다. 만약 아름다운 시절이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꿈과 환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때 찾아봐야 할 작가는 단연 알폰스 무하(1860~1939)다.
무명의 화가, 연극 포스터 하나로 ‘인생 역전’
무하는 체코 출신의 화가이자 디자이너로, 특히 공연 포스터를 포함한 광고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상품의 디자인을 주로 한 이력 때문인지 무하의 작품에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이미지가 가득하다. 무하는 프라하의 미술학교 시험에 낙방한 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장식 미술가로 일했다. 1888년 파리에 입성한 뒤로는 아카데미에서 최신 미술 경향을 학습하면서 생계를 위해 광고 디자이너이자 삽화가로 일했다.무명의 외국인 작가였던 무하의 삶을 하루아침에 뒤바꾼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1894년 말이다. 프랑스의 국민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을 맡은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 디자인을 맡게 된 것이다. 베르나르는 공연 기간 연장을 알리는 포스터 제작을 원했지만 마침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라 일할 디자이너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자신의 일러스트를 잡지에 연재한 경력도 있고 생계를 위해 연휴에도 일거리를 마다하지 않던 무하를 소개받아 급히 포스터 제작을 맡겼다. 포스터 속의 베르나르는 금박 장식으로 뒤덮인 비잔틴 귀족의 의상을 입은 채로 연극의 소품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난초 화관을 쓴 베르나르의 머리 위로는 후광처럼 보이는 아치를 그려 넣어 관람자들의 시선이 주인공의 얼굴로 향하게 했다.
포스터의 상단과 하단에 배치한 연극 제목과 극장의 이름도 비잔틴 모자이크 타일처럼 장식했다. ‘여신 사라’로 불린 베르나르의 화려하고도 우아한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이 포스터는 등장과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포스터 디자인에 열광한 사람들이 무려 2m가 넘는 크기로 제작된 거대한 포스터를 떼어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할 정도였다. 지스몬다 포스터는 이후로 몇천 부가 더 인쇄돼 배포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 포스터 덕분에 무하는 6년간 베르나르의 전속 디자이너로 일했고, 각종 유명 브랜드의 광고 디자인을 도맡게 됐다.
여신처럼 보이는 여성을 중앙에 배치한 뒤 꽃과 식물의 곡선과 패턴을 이용해 장식하고 파스텔 톤으로 채색한 그의 작품은 ‘무하 스타일’ 또는 ‘아르 누보의 상징’으로 불리며 유럽 각지와 미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나치의 표적 된 후 사망…‘벨 에포크’ 그 자체가 되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무하를 다시 한 번 국제적으로 알리는 무대였다. 만국박람회는 참여 국가들이 각국의 과학과 산업, 예술의 발전상을 과시하는 장이었다. 이 해에는 프랑스가 아르 누보를 미술과 건축 분야의 핵심 양식으로 제시하면서 아르 누보의 상징과도 같은 무하 스타일도 주목받았다. 무하는 박람회 기간 동안 보스니아 파빌리온의 벽화 제작에도 참여했다.무하는 1910년, 미술의 수도 파리에서 이룬 엄청난 성공을 뒤로하고 고향 체코로 돌아갔다. 20대 초부터 꿈꿔온 역사화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무하는 체코의 독립을 염원하는 역사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고국의 독립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의 염원대로 체코는 결국 1918년 독립했지만, 1939년 나치 정부에 의해 다시 프라하가 점령당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나치에게 체코인의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반영된 무하의 역사화는 탐탁지 않은 대상이었다.
결국 무하는 나치에 체포돼 조사받으며 고초를 겪었고, 후유증으로 폐렴을 앓다가 몇 달 뒤 사망했다. 체코에서 무하 스타일이 다소 올드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의 역사화는 나치의 표적으로 인식되던 1930년대, 무하를 다시 기억해낸 것은 파리였다. 1936년 파리의 주 드 폼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은 대규모 역사화인 ‘슬라브 서사시’를 포함한 139점의 작품이 전시된 무하의 대규모 회고전이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고향인 체코 못지않게 무하의 전시가 자주 열리는 곳도 바로 파리다. 2018년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이 큰 화제를 모은 데 이어 올해 3월부터 파리의 그랑 팔레 이메르시프에서도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 ‘영원한 무하’전이 열리고 있다.
무하의 작품은 벨 에포크 시기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파리의 미술관들이 무하의 전시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무하는 외국인 미술가들에게도 개방적이고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던 과거의 미술 중심지 파리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작가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하는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이 여전히 현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작가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무하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 영원히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