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 마르쿠스 슈텐츠)과 협연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 마르쿠스 슈텐츠)과 협연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미국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56)이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 마르쿠스 슈텐츠)과의 협연 무대에 등장하자 공연장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조슈아 벨의 공연에서는 연주 전부터 청중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례적인 장면이 아니다.

일단 클래식 애호가라면 그의 이름과 얼굴이 선명히 자리 잡은 음반들을 모를 수 없어서다. 미국 그래미상, 영국 그라모폰상, 독일 에코클래식상 등 국제적 권위의 음반상을 휩쓴 인물이 바로 조슈아 벨이다. 2000년 미국 주간지 피플이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오를 만한 수려한 외모는 덤이다.

이날 조슈아 벨이 선보인 첫 작품은 쇼송의 ‘시(詩)’였다. 관능적인 분위기를 지닌 단일 악곡으로 벨이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말한 작품. 그는 악기에 활을 대는 순간부터 유리알 같은 맑은 음색과 섬세한 보잉(활 긋기)으로 작품 특유의 애수 젖은 서정을 펼쳐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없이 홀로 선율을 이어가는 독주 구간에서는 속도, 길이 등 활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조율하면서 긴장감을 키워냈다. 가벼운 왼손 터치와 부드러운 보잉으로 매끄럽게 선율을 처리하다가도 한순간 현에 가하는 장력을 더하면서 격정적인 악상을 표현해내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 마르쿠스 슈텐츠)과 협연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 마르쿠스 슈텐츠)과 협연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다음 곡은 화려한 기교와 비장한 선율로 유명한 비외탕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이었다. 벨은 연주 초반부터 선명한 음색과 강렬한 터치로 비외탕 특유의 역동성을 살려냈다. 단숨에 저음에서 고음으로 선율의 방향을 끌어가는 추진력은 열정적인 악상을 뿜어내기에 충분했다.

그의 진가(眞價)는 고음으로 이뤄진 선율 연주에서 드러났다. 벨은 과도한 힘 하나 없이 무언가를 깊이 갈구하듯 애절하면서도 가냘픈 음색으로 거대한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만한 순간이었다. 연신 왼손과 오른손을 긴밀하게 움직이면서 유선형의 자연스러운 울림을 만들어내면서도 중요 음은 철저히 짚어냈다. 마치 바이올린을 가지고 노는 듯했다.

화음을 바꿔가며 활을 빠르게 굴리는 구간에서 연주가 매끄럽지 못하고 음정이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으나, 이내 유려한 선율 처리와 극적인 표현으로 여유를 되찾았다. 1분 남짓의 마지막 악장에서는 손에 익은 듯 유려한 왼손 테크닉과 장대한 활 움직임이 강렬한 추진력을 만들어내며 응축된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러자 청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슈아 벨이 40년 넘게 세계 무대에서 활약해온 저력이 무엇인지 알려준 무대였다.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마르쿠스 슈텐츠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마르쿠스 슈텐츠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서울시향의 연주로 채워진 2부는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으로 문을 열었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음악계에서 인상주의 작풍을 확립시킨 곡으로 평가받는 작품. 지휘자 슈텐츠가 손을 움직이자 플루트가 공기를 머금은 묘한 음색으로 드뷔시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살려냈다. 현악기의 섬세한 터치와 응축된 소리는 흐릿한 조성감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는 관악기 선율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여러 방향으로 퍼지면서 마치 음악을 뭉뚱그려 선보이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큰 실수는 없었으나 정제된 오케스트라 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조화로움의 힘이 부재한 것은 아쉬움을 남겼다.

공연의 대미는 이교도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을 그려낸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장식했다. 원시적인 색채와 끝없이 변화하는 강렬한 리듬으로 20세기 현대음악을 대표하는 명곡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악단은 시작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바순의 민속적이면서도 명료한 선율 뒤로 등장하는 호른 연주에서 실수가 있었다. 이후에도 각 악기군에서 잔 실수들이 보였으나 '봄의 제전'이 악명 높은 난곡(難曲)이란 점을 감안하면 감상을 저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울시향의 혹독한 연습량을 짐작해볼 법했다.

아쉬운 건 기교가 아닌 앙상블 차원이었다. 슈텐츠가 꽤 큰 폭으로 악상에 변화를 주면서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청중의 집중력을 끌어올릴 만했다. 문제는 명확히 존재감을 뽐내야 하는 전경과 빠르게 소리의 뒤편으로 사라져야 하는 후경의 대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소 혼란스러운 인상을 남기는 스트라빈스키 음악에서는 각 악기군이 전경과 후경을 넘나들면서 만들어내는 입체감이 압권인데, 그 매력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불명확한 리듬 표현도 더러 있었다. 분명 빈틈없는 연주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만 이 또한 대작(大作)을 소화하기 위한 서울시향의 여정이라 본다면 유의미한 연주일 것이다.

이날 공연 전체를 돌아봤을 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단연 조슈아 벨의 연주였다. 녹슬지 않은 기교와 한층 더 깊어진 그의 음색에서 세월이 주는 음악적 선물을 엿볼 수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보다 더 정확히 그의 연주를 표현할 단어가 있을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