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임헌정이 지난 11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혁 기자
지휘자 임헌정이 지난 11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혁 기자
20여 년 전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국내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무대에 올리며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말러 신드롬’을 일으킨 마에스트로가 있다. 4년(1999~2003년)에 걸친 집요한 도전, 음악에 대한 깊은 통찰, 단원들을 하나로 묶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말러는 어렵다’는 인식을 바꿔 놓은 지휘자. 임헌정(70)이다.

그에게는 ‘뚝심 있는 거장’이란 수식어가 으레 따라붙는다. 1988년 정단원 다섯 명이던 ‘동네 악단’ 부천필을 맡아 25년 뒤 한국 최고 교향악단의 하나로 키워내서다. 베토벤 교향곡, 브람스 교향곡,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연주 등 한 작곡가의 작품 세계를 파고드는 시리즈로 수많은 명연주를 남겼다.

그런 그가 자기 대표 레퍼토리인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들고 청중과 만난다. 24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한경아르떼 더클래식 2023’ 다섯 번째 공연에서 한경아르떼필하모닉 및 협연자(소프라노 황수미·메조소프라노 이아경)들과 호흡을 맞춘다. 그가 한경아르떼필의 지휘봉을 잡는 것은 2018년 이후 5년 만이다.

지난 11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 본사에서 만난 임 지휘자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기자가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악보에서 눈을 뗐다.

“이번 공연에 제 나름의 목표를 세웠어요. ‘새로운 말러의 세계를 펼쳐내겠다’는 거죠. 나이가 들면서 작품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리 모티브 하나, 리듬 처리 하나, 음색 표현 하나까지, 예전엔 몰랐던 게 보여요. ‘최고의 것은 음표 안에 없다’고 말러가 왜 말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교향곡 2번은 말러가 평생 천착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담은 곡이다. 임 지휘자는 이 작품에 대해 “처절한 죽음을 표현한 1악장과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비추는 2악장을 지나 장대한 부활을 마주하는 5악장에 이르는 과정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하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단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각 악곡에 맞는 캐릭터와 소리를 구현해내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며 “1시간20분짜리 대작의 진가(眞價)를 보여주는 데 온 힘을 다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임 지휘자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각별한 곡이기도 하다.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결심한 것도 이 곡을 만난 뒤였다.

“1996년 서울대 개교 5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이 작품을 지휘했습니다. 당시 건강이 매우 안 좋아 의자에 앉아서 지휘했죠. 5악장에 합창단 250여 명이 ‘부활하라’고 소리치는 대목이 있어요. 순간 저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말러 음악이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와 이를 표현해낸 음악가들의 소리에 전율이 일더군요. 그게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하게 된 계기였어요.”

임 지휘자는 완벽주의자로 통한다. 최상의 소리를 끌어내기 위해 단원들을 혹독하게 연습시킨다. 단 하나의 음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흔히들 ‘먹는 거로 장난치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예술도 음식과 똑같습니다. 음식이 몸을 살찌운다면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살찌우기 때문이죠. 그러니 사람의 영혼을 채우는 일을 대충 해선 안 되죠. 저는 ‘완벽한 연주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음악가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걸 양보해도, 최선의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만큼은 절대 봐줄 수 없어요.”

산전수전 다 겪은 노(老) 지휘자에게 음악가로서 성취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가 뭔지 물었더니,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음악가가 되는 겁니다. 음악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을 한뼘 더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베토벤이 교향곡 9번 ‘합창’을 통해 인류애를 목놓아 노래한 것처럼요. 누군가 제 음악을 듣고 삶에 대한 애정과 의욕을 얻는다면, 그보다 더 멋진 일이 또 있을까요.”

임 지휘자는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소프라노 황수미와 메조소프라노 이아경과는 한 차례 호흡해본 적이 있는데, 너무 훌륭한 성악가들이라 별걱정 없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고민할 겁니다. 그래야 관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연주를 선사해드릴 테니까요.”

김수현/조동균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