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뒷모습에 대한 짧은 생각들
<하나 그리고 둘>

8살 소년은 선물을 받는다. 아빠가 주신 카메라. 어린 소년은 뷰파인더 너머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어린 소년이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찍는지는 가족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할머니와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돌아가는 자신의 삶의 중요성 때문에, 어린 소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카메라에 무엇이 담기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이 찰칵찰칵 셔터를 누를 때 화면 가득 보여지는 어떤 풍경 중 일부분이 찍히겠거니 하는 정도랄까.
그러다가 비로소 소년의 사진들이 공개된다. 그 사진 속에는 가족들의, 친척들의, 지인들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가족들은 사진을 휘휘 넘겨보며 말한다. 죄다 뒷모습이네. 왜 앞모습은 찍지 않는 거니? 굳이 답을 들으려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아무도 제대로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뒷모습만 찍은 소년의 사진은 애초부터 큰 관심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우리의 사정은 좀 달라진다. 소년이 찍은 뒷모습 사진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간다. 그리고 불현듯 깨닫는다. 아아, 누군가의 뒷모습은 어쩌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인가, 누군가의 뒷모습은 어찌 이리 무방비 상태인가 ...
어린 소년 양양은 말한다. 자기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그래서 사진을 찍어 보여 주고 싶었다고.
오래 전 모영화제에서 본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 어쩐지 양양의 뒷모습 사진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II.

뒷모습에 대한 짧은 생각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제는 나이가 늘어 걸음걸이마저 느려진 데이지가 아장거리는 손을 잡고 걷는다. 아름다운 청춘의 세월을 재능과 칭찬과 사랑으로 채워 보내고 이제는 느릿하고 느긋한 시간 속을 살고 있는 데이지. 그녀가 잡은 작은 손의 주인은 마치 손자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뒷모습은 어딘가 콧날을 찡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어딘가 마음 한 귀퉁이를 살짝 무너뜨리는 구석이 있다. 아름답고 평온한 어느 나날의 하루이며 순간일 텐데도 말이다.

데이지가 벤자민을 처음 만난 때는 지금부터 꽤 오래 거슬러 가야 한다. 총명해 보이는 예쁜 푸른 눈동자를 가진 데이지는 그, 벤자민을 보았다. 벤자민은, 글쎄 뭐랄까 ... 그가 태어난 시기부터 나이를 계산한다면 데이지 또래이지만 그의 외모는 생물학적으로 보아 상당히 나이든 노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나이나 외모에 민감하고 까탈스럽게 굴지 않는 데이지는 그를 친구로 받아들였고 그 눈동자와 그 태도는 벤자민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운명은 벤자민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꽤 다른 시간을 주었다. (그것을 선물이라 해야 할지 저주라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80세 노인의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 그 아기는 분명 흉물스럽고 끔찍한 작은 괴물 같았다. 그로 인해 친부에게 버림받은 아기는 그러나 다행히 그의 특별한 운명에 개의치 않는 사람들을 만나 천천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간을 살면서 점점 어려지고 있는 중이다.
벤자민이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젊어지는 동안 데이지와 몇 번 조우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나이가 비로소 비슷해졌을 때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다. 딱 거기서 벤자민과 데이지의 시간이 맞춰지지만 벤자민의 시간은 여전히 거꾸로 흐르고 그렇게 지금 그는 나이 든 데이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가 되었다.
산책을 하다가 데이지는 문득 허리를 굽혀 어린 꼬마에게 입을 맞춘다. 그 뒷모습은 두 사람의 각기 다른 그러나 함께 해 온 시간의 흐름과 그 시공간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던 시절을 한꺼번에 보여 준다.

그런 뒷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절대, 잊을 수 없다.

III.

뒷모습에 대한 짧은 생각들
<3000년의 기다림>

알리테아는 노트를 덮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노트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알리테아 자신의 이야기, 지니의 이야기, 지니가 겪어 온 오랜 시간 속 누군가들의 이야기. 그 때 그녀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온다. 그다. 작고 아름다운 유리병 속에 갇혀 있다가 알리테아가 유리병을 닦느라 세차게 솔질을 했을 때 느닷없이 튀어 나와 깜짝 놀라게 했던 그가 저 멀리서 걸어온다.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알 수 없는 그러나 애정과 반가움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다가 온다. 3년 만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 그리움과 뿌듯함과 넘치는 사랑과 자제심을 불러일으킨다.
3000년 동안 자신을 자유롭게 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던 지니. 그는 사람들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건만 어쩐 일인지 번번이 다시 병 속에 갇혀 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서사학자 알리테아를 만나지만 그녀는 소원 따윈 없다고 말하며 그저 지니의 긴 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일종의 구속이다. 알다시피. 하지만 더 큰 사랑은 그 구속을 내던지고 자유를 주어야 함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알리테아는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고 지니에게 진정한 자유를 준다. 그리고 3년 뒤 드디어 그와 재회한 것이다.
둘은 걷는다. 씩씩하고 가벼운 발걸음을 함께 내딛는다. 둘의 뒷모습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 지니가 알리테아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 지니가 세상으로부터 얻은 새로운 이야기 그리고 그런 지니로부터 알리테아가 새롭게 전해들을 이야기….
인간의 나이로 볼 때 알리테아가 더 이상 젊지 않기에 이 둘의 뒷모습은 어딘가 애처롭고 뭉클하다. 인간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지니는 그 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알리테아의 뒷모습이 기쁨과 행복감을 담고 있으면서도 쓸쓸하고 서글프다.

가장 무방비 상태이며 가장 보기 어려운 자기 자신의 뒷모습. 그래서 가장 많은 말을 하는
가장 솔직한 얼굴이 우리의 뒷모습이 아니겠는가.
지금 당신의 뒷모습은 어떤 표정일까.

신지혜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