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자코포 폰토르모가 그린 코시모 데 메디치 초상화. 우피치미술관 소장.
화가 자코포 폰토르모가 그린 코시모 데 메디치 초상화. 우피치미술관 소장.
작은 환전소에서 시작해 유럽 최고 은행가가 되고, 될성부른 ‘떡잎 인재’들을 찾아 위대한 예술가로 키우며, 오페라와 발레를 창시하고, 피아노 발명까지 도운 특별한 문화예술 후원자….

르네상스 황금기를 연 메디치 가문도 출발은 아주 미약했다. 평범한 상인계층으로 직물업에 오래 종사했다. 이 가문의 창업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피렌체에 메디치 은행을 설립한 것은 1397년. 이미 70개 이상의 은행이 있었으니 여러모로 불리한 후발주자였다. 그나마 나폴리 출신의 발다사레 코사 주교와 거래가 성사됐다. 그 주교가 추기경이 되고 1410년에는 교황(요한 23세)이 되자 그를 지원한 메디치 은행은 급성장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교황이 5년 만에 쫓겨나면서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게 된 것이다. 조반니는 교황이 돈을 갚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엄청난 금액을 빌려줬다. 갈 곳 없는 교황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며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부실채권까지 떠안으면서 고객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이 모습을 지켜본 새 교황은 조반니에게 교황청 주거래 임무를 다시 맡겼다.

금융으로 번 돈 문화예술에 전폭 지원

이 ‘신뢰 자본’은 메디치 가문의 핵심 가치가 됐다. 금융 자본에서 문화예술 자본으로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예술가를 발굴하고 후원을 늘리면서 ‘신뢰’ 위에 ‘창의’와 ‘문예부흥’이라는 시대적 사명까지 곁들였다.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는 유능한 기업가이자 정치가였으며 뛰어난 인문학자였다. 그는 금융으로 번 돈을 예술가와 건축가·철학자·과학자 후원에 아낌없이 썼다. 그리스 철학에 심취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1만여 권의 고대 문헌 등 희귀 도서를 사들여 시민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산 마르코 수도원에 마련한 메디치 도서관은 근대 최초의 공공도서관이 됐다. 그의 철학아카데미와 도서관 건축에 전 유럽 지성이 매료됐고 각지의 인재가 모여들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를 ‘국부(國父)’로 추앙했다.

그 손자 로렌초의 예술 사랑은 더 뜨거웠다. 그는 14세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키워냈다. 그냥 후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자로 들여 궁정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자기 아들들의 과외를 맡은 당대 최고 학자들의 수준 높은 교육을 함께 받고 문학과 철학적 소양까지 갖추게 했다. 조각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원에 비싼 대리석을 가득 쌓아놓고 언제든 연습하게 도왔다. 이런 토대 위에서 ‘다비드상’과 ‘피에타상’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같은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보티첼리의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과 ‘봄의 귀환’도 이때 나온 걸작이다. 로렌초는 보티첼리의 초기작을 보고 과감하게 고용해 20대 청년에게 초대형 프로젝트를 맡겼다. 지동설을 주장해 교황청의 탄압을 받은 갈릴레이 갈릴레오를 후원해 천문학을 발전시킨 것도 메디치 가문이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고 ‘메디치의 별’이라고 명명해 보답했다.
보티첼리가 그린 '메디치 메달을 든 청년'.
보티첼리가 그린 '메디치 메달을 든 청년'.
오페라와 발레도 이 가문이 창시했다. 1600년 메디치 가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가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결혼할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피렌체에서 펼친 공연예술이 최초의 오페라다. 유명 작곡가 3명이 만든 오페라가 베키오궁과 피티궁, 우피치궁에서 연일 펼쳐지자 시민들은 환호했고, 이것이 프랑스를 거쳐 세계로 전파됐다.

발레의 탄생은 이보다 앞섰다. 1533년 프랑스 왕실로 시집간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아들 앙리 3세 시절 발레 공연을 처음 선보였다. 당시 발레는 춤과 음악, 노래와 시낭송까지 결합한 형태였다.

피아노의 발명 또한 이 가문의 숨은 업적이다.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궁정 악기 관리와 보수를 맡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1709년 만들어낸 것이 지금의 피아노다. 그전까지는 파이프를 활용한 오르간과 페달을 이용한 클라비코드, 지렛대 원리로 현을 울리는 하프시코드가 쓰였다. 현을 해머로 쳐서 소리를 내는 현대 피아노를 발명한 크리스토포리는 자신을 인정해준 메디치 가문에 이를 헌정했다.

이렇게 다방면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함으로써 문화의 창조적 역량을 키우고 마침내 르네상스 시대를 연 데에서 유래된 말이 ‘메디치 효과’다. 이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결합해 뛰어난 작품을 만들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것을 뜻하는 경영이론이다. 메디치 가문이 보통의 상인 집안에서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한 유럽 명문가로 거듭난 비결도 여기에 있다.

메디치 가문이 350년간 키우고 간직한 예술품들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모여 있다.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가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모든 소장품을 기증한 덕분이다. 이 막대한 경제적, 문화적 자산의 이면에 메디치 가문 특유의 예술 유전자 ‘아르떼(arte) 정신’이 흐르고 있다.

아르스(ars)->아르떼(arte)->아트(art)

당시 피렌체에는 20여 개의 상공업자 조합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 조합을 가리켜 ‘아르떼(arte)’라고 불렀다. 규모와 영향력이 큰 대(大)아르떼는 법률, 모직물, 견직물, 은행, 의약 등 7개 조합이었고, 소(小)아르떼는 목공, 석공 등 14개 조합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금융조합인 ‘아르떼 델 캄비오’와 모직물 조합인 ‘아르떼 델라 라나’ 등 두 개의 큰 조합에 가입돼 있었다.

피렌체는 이들 아르떼에 속한 약 3000명의 상공업자가 시정을 이끄는 특이한 정치구조를 가졌다. 이름난 귀족도 이 조합에 가입돼 있지 않으면 기업을 운영할 수 없고 공직에도 나갈 수 없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군주가 되고 시에나를 합병한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까지 될 수 있었던 게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연유한다.

아르떼는 이탈리아어로 예술과 기술, 의술, 예능 등을 의미하는 단어다. 어원은 라틴어 아르스(ars)인데, 여기에서 영어 아트(art)가 나왔다. 아트(art)에도 ‘예술’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기술’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지난 1일 문을 연 문화예술 플랫폼 ‘아르떼(arte.co.kr)’는 공간예술과 시간예술을 폭넓게 아우르는 21세기형 ‘르네상스 광장’이다. 어디서 무슨 공연이 열리는지, 수준은 얼마나 높은지, 어떤 얘기가 숨겨져 있는지 날마다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조수미 이자람 김연수 등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 100명의 칼럼도 만날 수 있다. ‘경제와 문화의 가교’ ‘조화와 융합의 축제’라는 근본 가치까지 공유할 수 있어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