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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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가 대낮부터 술집을 찾아옵니다. 최고급 맞춤정장을 입었죠. 너덜너덜하게 낡아버리긴 했지만요.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창백한 이 남자는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어요. 하지만 변변한 직업이 없죠. 할 줄 아는 거라곤 글을 읽는 것 뿐. 외상으로 낮술을 마시고 도둑질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갑니다.

루쉰의 단편소설 '쿵이지'를 요새 버전으로 바꾸면 아마 이런 내용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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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인공 '쿵이지'는 청나라 말기의 몰락한 지식인이에요. 귀족의 옷인 장삼(長衫)을 입었지만 "십수 년 동안 꿰매기는커녕 빨래조차 한 일이 없는 것 같"은 허름한 차림새입니다.

말끝마다 "군자는…" 하는 걸 보면 글 깨나 읽은 사람인 것 같기는 해요. 하지만 지금은 초라한 신세죠. 허름한 선술집에서 자리조차 못 잡고 서서 술을 마실 정도로 가난해요.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말을 들어보면, 쿵이지는 원래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출세하지 못해 이도저도 아닌 처지가 됐대요.

이 작품이 발표된 건 1919년 4월. 100년도 훌쩍 전에 쓰여진 이 소설이 최근 중국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중국 소셜미디어에서 "나는 밝고 명랑한 쿵이지"라는 노래도 퍼지는 중입니다.
'쿵이지' 삽화. 바이두백과 캡처.
'쿵이지' 삽화. 바이두백과 캡처.
쿵이지 소설이 발표된 1919년은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을 즈음이에요. 루쉰은 이 작품을 통해 봉건 지식인들을 풍자합니다. 근대화의 물결이 거센데 '공자왈 맹자왈' 옛 학문만 곱씹는, 시대에 뒤처진 모습을 비꼰 거죠.

루쉰은 중국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을 향해 매서운 비판을 했던 것만큼이나 '혁신하지 않는 중국'에도 날선 비판을 합니다.

'아Q정전'을 쓴 루쉰은 중국 대표 작가죠. 하지만 그간 중국에서는 '언제 적 루쉰이냐'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루쉰의 시대적 역할은 이미 끝났다'는 말까지 나왔고요.

몇 년 전 중국 교과서에서 루쉰의 글이 대폭 삭제돼서 이슈가 된 적이 있어요. 그 자리는 개혁 개방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던 작가와 지식인들의 글이 채웠죠.

중국 청년들이 쿵이지를 다시 집어든 건 학력 인플레이션과 실업난 때문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공부한 끝에 쿵이지처럼 됐다"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나사를 조이는 노동자가 되어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쓸데없이' 열심히, 많이 공부했다고 한탄하는 거죠.

오늘날 쿵이지들은 '학벌'이 낡은 장삼이 됐다고 말합니다. 과거, 중국의 급속 성장기에는 학벌만 좋으면 번듯한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죠.

하지만 중국이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지금, 학벌은 더 이상 좋은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이제껏 교육에 투자한 비용을 생각하면 눈높이를 낮추기도 쉽지 않고요. 결국 청년 고용 문제가 심각해졌죠.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중국의 3월 16∼24세 청년 실업률은 19.6%에 달했어요. 1∼2월(18.1%), 작년 12월(16.7%)보다도 높아졌죠.

리창 중국 신임 총리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취업은 민생의 근본으로, 취업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 방법은 경제 성장에 기대는 것"이라고 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리오프닝(경기 회복)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해요.

저성장 우려, 학력 인플레이션, 일자리 미스매치, 청년 실업, 그리고 터져나오는 청년들의 자조… 이런 풍경은 어쩐지 익숙합니다. "헬조선"을 외치는 한국 청년들이 떠오르지 않나요.

중국 내에서는 쿵이지의 역주행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중국 관영 방송인 중앙TV(CCTV) 인터넷판은 최근 '쿵이지 문학 배후의 초조함을 직시하라'는 평론을 싣고 이렇게 주장했어요.

"(소설 속) 쿵이지의 삶이 몰락한 건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지식인의 허세를 버리지 못하고 노동으로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뜻있는 청년들은 (쿵이지처럼) 장삼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청년들에게 '일단 장삼(학벌)부터 갖춰 입어라'고 부추겨온 어른들의 책임도 생각해볼 문제죠.

소설은 쿵이지가 행방불명 상태인 채 끝납니다. 선술집에서 일하는 '나'가 기억하는 쿵이지의 마지막 모습은 다리가 부러진 채 흙바닥을 기어와서 외상 술을 마시는 모습. 소설 결말은 이래요. "나는 지금까지도 끝내 그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쿵이지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 같다."

중국 청년들도, 한국 청년들도 자신의 삶이 이런 결말을 맞기를 원치 않는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난 뒤 '언제 적 루쉰, 언제 적 쿵이지(또는 헬조선)냐' '그런 한탄은 이제 옛날 말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