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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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일하고, 저축하고, 걱정합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인생은 참 신비로워요. 마치 체리 한 사발(bowl of cherries) 같죠.”

재즈가수 겸 색소포니스트 루디 발레(1901~1986)의 노래 ‘인생은 체리 한 사발’에 나오는 가사다. 체리가 담긴 사발은 ‘달콤한 인생’을 은유한다. 1931년 나온 노래에 미국 대중은 열광했다. 1분당 비트 수(BPM)가 122에 달하는 빠른 템포, 낙관적인 가사 덕에 1930년대를 풍미한 유행가가 됐다.

노랫말과 현실은 달랐다. 1929년부터 경제 대공황이 촉발됐다. 노래가 나온 1931년 미국의 실업자 수는 800만 명에 육박했다. 공업 도시인 시카고주의 실업률은 40%에 달할 정도였다. 재즈를 들으며 현실을 잊으려는 현상이 확산했다는 분석이다.
1920년대 미국 경제 대공황에 지친 사람들이 재즈바에서 빠른 리듬의 음악 ‘스윙’을 들으며 춤을 추고 있다.
1920년대 미국 경제 대공황에 지친 사람들이 재즈바에서 빠른 리듬의 음악 ‘스윙’을 들으며 춤을 추고 있다.
대공황에 지친 미국 국민은 너나없이 클럽을 찾았다. 클럽마다 연주자 10명 이상으로 이뤄진 빅밴드가 열렬히 재즈의 한 장르인 스윙을 연주했다. 춤을 출 수 있게 박자는 빨랐고 멜로디는 경쾌했다.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 베니 굿맨 등 재즈 거장들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시점이다.

1933년까지 금주령이 이어져도 클럽은 북새통을 이뤘다. 손님을 붙들어놓으려 ‘댄스 마라톤’도 열었다. 수백 시간 동안 스윙 댄스를 추는 경연대회를 뜻한다.

주정부는 클럽에 부과하는 세율을 높이고 스윙 마라톤을 금지하는 조례까지 통과시켰다. 국민 정서가 타락할 것이란 이유에서다. 1939년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스윙은 더 큰 인기를 끌었다.

해리 스타일스
해리 스타일스
최근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금리가 급격히 인상하며 경기가 둔화하자 빠른 템포의 댄스곡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열린 제65회 그래미어워드에서도 댄스곡이 강세를 보였다. 팝가수 리조의 ‘어바웃 댐 타임’이 올해의 레코드를, 해리 스타일스가 올해의 음반을 수상했다. 둘 다 평균 BPM이 100을 웃돈다. 일반적으로 트로트의 BPM은 60~90, 힙합은 80~100에 머문다. 해리 스타일스의 ‘애스 잇 워스’는 평균 174 BPM을 찍었다. 팝의 여왕 비욘세도 평균 BPM이 100을 넘긴 음반 ‘르네상스’로 4관왕에 올랐다.

우연은 아니다. 경기 침체가 접어들 때마다 빠른 박자의 댄스곡이 인기를 끌어서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힙합 그룹 블랙아이드피스, 팝가수 레이디 가가 등이 빠른 박자의 댄스곡을 앞세워 빌보드 차트를 장악했다. 한국에서도 BPM이 200에 달하는 소녀시대의 대표곡 ‘Gee’가 2009년을 휩쓸었다.
팝의 여왕 비욘세
팝의 여왕 비욘세
인플레이션과 석유 파동이 잇따른 1980년대에는 스웨덴의 팝그룹 아바(ABBA)를 중심으로 디스코가 울려 퍼졌다. BBC가 영국 음악 차트를 분석한 결과 2009년 평균 템포가 124 BPM에서 2017년 104 BPM으로 감소했다. 2017년 미국 빌보드 차트는 템포가 평균 90 BPM까지 내려앉았다.

경제 위기가 진화되자 느린 템포의 발라드곡이 인기를 끈 것이다. BBC는 “코로나19가 퍼진 2020년에는 차트 상위 20곡의 평균 박자가 122 BPM에 달했다”며 “2009년 이후 최고치”라고 설명했다.

왜 그럴까.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은 ‘현실 도피 심리’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빠른 박자와 묵직한 저음은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한다. 세로토닌은 긍정적 감정을 형성하고 도파민은 쾌감을 일으킨다. 영국의 심리학자 너태샤 핸드리는 “묵직한 저음은 도파민 분비를 늘리고, 빠른 박자는 체내 세로토닌 수치를 높인다”며 “불안함을 해소하려는 심리 때문에 댄스 음악이 불황기에 인기를 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