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처럼 익숙해진 전쟁…'서부 전선 이상 없다' [영화 리뷰]
“1945년부터 1990년 사이 지구에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단 3주에 불과하다.” (세계적 석학 故 앨빈 토플러)

전쟁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엄밀히 따지면 정전 협정을 체결한 한국도 종전에 이르진 못했다.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우크라이나 전쟁도 어느덧 개전 1주년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전쟁이 먼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지난해 10월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반전(反戰) 메시지를 전면에 부각하며 ‘일상처럼 익숙해진 전쟁’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은 독일 출신의 에드워드 버거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1929년에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건 1930년과 1979년 이후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13일 열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비롯해 촬영 미술 음악 등 4부문에서 수상했다. 넷플릭스 등 OTT 영화 중 최다 기록이다. 주연은 펠릭스 카머러가 맡았다.

영화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과 독일군이 격돌한 서부전선을 배경으로 한다. 당초 독일은 ‘슐리펜 계획’으로 서부의 프랑스로 침입해 신속한 승리를 거두고 동부의 러시아를 공격하는 단기전을 구상했다. 하지만 마른 전투에서 패배한 뒤 계획이 틀어지며 전쟁이 장기화했다.

특히 프랑스와의 접경지대에서 벌어진 참호전은 처절한 소모전 양상을 띠었다. 양쪽 진영 사이의 무인 지대에 달려드는 병사들은 기관총에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 잦은 침수로 위생 상태도 열악했다. 영화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전쟁의 참상을 강렬한 시각적 효과와 절제된 배경음악으로 표현했다.

이야기는 17세 독일 소년 파울의 시점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파울은 대학에서 민족주의자 전쟁광의 연설을 듣고 한껏 고무된다. ‘프랑스를 점령해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겠다’며 들뜬 마음으로 입대를 결심한다.

하지만 전쟁의 참혹한 현실은 그의 이상과 달랐다. 매캐한 화약의 냄새, 흙탕물로 범벅이 된 시체들, 살갗을 파고드는 차가운 쇠붙이. 병사들은 전차에 산 채로 짓눌리기도, 화염방사기에 타죽기도 한다. ‘전쟁의 부품’에 불과한 전사자들은 새로운 병사들로 대체될 뿐이다.
일상처럼 익숙해진 전쟁…'서부 전선 이상 없다' [영화 리뷰]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전쟁이 말살하는 인간성’이다. 특히 파울이 구덩이 속에서 적병과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압권이다. 도처에 적군이 산재한 상황, 그는 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죽어가는 적병의 입에 흙을 쑤셔 넣는다. 뒤엉켜 씨름한 결과 파울의 얼굴도 진흙으로 두껍게 칠해진다. 마치 가면을 쓴 괴물을 연상케 한다. 전쟁이 형성한 페르소나가 인간성마저 지우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색채의 활용도 돋보인다. 영화 초반 전장의 분위기는 회색, 청색 등 차가운 계열로 묘사되는 반면 평화로운 민간의 공간은 원색 계통의 다채로운 색으로 그려진다. 마치 꿈과 현실처럼 두 공간이 명확히 분리된다.

이러한 구분은 중간에 뒤틀린다. 일상과 전쟁터 사이 색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진다. 파울이 18개월 차 병사가 된 영화 중반엔 전쟁터의 색채도 화려하게 변한다. 적군과 사투를 벌이는 도중에 적의 참호에 놓인 빵과 음료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마시기도 한다. 파울에게 전쟁이 어느덧 삶의 일부가 된 모습이다.

영화는 독일 사령부의 보고서 문구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마무리된다. 전쟁과 죽음이 일상화된 나머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의미다. 오늘날 현대 사회도 전쟁의 참상에 지나치게 둔감해진 것은 아닐까. 영화는 무거운 여운을 남긴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