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19C '천재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붓 꺾을 위기' 구해준 평론가 '은인'
그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그런데도 인생 행복했다고?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세부 이미지. 영국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테이트미술관 소장“아무리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 해도, 당신은 내 은인의 아내야. 자꾸만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당신이 그린 그림처럼.”
1854년 영국 런던, ‘금지된 사랑’을 하는 두 남녀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을 겁니다. 남자는 유명 화가였던 존 에버렛 밀레이. 밀레이는 매일같이 드나들던 은인의 집에서 그의 아내, 에피 그레이를 보고 그만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오필리아 전체 이미지.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자신이 사랑하는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자 미쳐버려 스스로 강에 빠져 익사한다.그레이도 머지않아 밀레이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갈수록 둘의 사랑은 깊어졌고, 급기야 그레이는 남편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막 내려는 참입니다. 지긋지긋했던 결혼 생활을 끝내고 밀레이와 새 출발을 하려는 거지요. 도대체 이 남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앞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밀레이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매장당할 뻔한 ‘그림 신동’, 은인 덕에 기사회생
밀레이의 자화상(1881). 젊었을 때는 꽤 미남이었을 듯 하다. /우피치미술관 소장1829년 영국에서 태어난 밀레이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그림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밀레이의 손을 잡은 어머니가 왕립예술원을 찾아가 “얘는 천재니 얼른 입학시켜달라”고 다짜고짜 요구한 게 9살 때. 소년을 힐끗 본 왕립예술원 회장은 당연히 코웃음을 쳤습니다. “화가는 무슨 화가. 굴뚝 청소부 훈련이나 시키세요.”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레이의 그림을 하나하나 보여줬습니다. 회장의 눈이 점점 커졌습니다. “얜 뭡니까. 천재인가요?” “아까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호호.”
아무리 그래도 9살은 왕립예술원에서 공부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회장은 밀레이를 기초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 밀레이는 11살의 나이에 왕립예술원에 들어갔습니다. 왕립예술원 역사상 최연소 입학생의 탄생이었습니다.
왕립예술원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르네상스 미술을 주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밀레이가 보기에 이런 미술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밀레이가 1848년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일종의 비밀 조직인 라파엘전파(르네상스 거장인 라파엘로 이전 대세였던,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추구하는 유파)를 결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결성 이듬해 밀레이는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를 그렸습니다. ‘이 훌륭한 작품을 보면 사람들도 우리 생각에 공감하겠지.’ 완성된 작품을 본 밀레이는 뿌듯했습니다.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1849). 실수로 손바닥을 못에 찔린 소년 예수는 피를 흘리고 있고, 가족들은 이를 걱정하고 있다. /테이트 소장
그림 세부. 손바닥에 난 상처는 훗날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어머니 마리아는 소년 예수의 상처를 보고 걱정이 가득하다. 잘 그렸지만 처음 발표했을 땐 "불경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밀레이의 그림에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로 지금까지도 유명한 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대표적입니다. “성스러운 가족을 무슨 술주정뱅이와 거지처럼 그렸다.” 화가로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한 밀레이. 그를 구해준 건 권위 있는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그려낸 밀레이와 그 동료들이야말로 영국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만들 사람들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밀레이의 '마리아나'. 아름다운 여성이 수를 놓다가 잠시 일어서서 허리를 젖히고 몸을 풀고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영감을 받은 시인 테니슨의 '마리아나'라는 시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 시에서 여인은 떠나가버린 연인을 허망하게 기다린다. 섬세한 색채 및 세부 표현이 일품이다. /테이트 소장미술계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비평가의 극찬에 여론은 단숨에 반전됩니다. “러스킨 말을 듣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니, 엄청나게 잘 그리긴 했네….” 러스킨이 크게 돕긴 했지만, 밀레이의 그림 실력이 워낙 뛰어났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이후 밀레이는 러스킨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합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 연인'(1851~1852). 라파엘전파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은 1572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가톨릭 세력의 신교도 학살을 다룬 작품이다. 젊은 여성은 연인의 왼팔에 '카톨릭 신자의 상징'인 흰색 완장을 두르려 하지만, 남성은 여인을 부드럽게 제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영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라파엘전파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개인소장모든 게 잘 풀리는 것 같았던 1853년 여름, 러스킨은 자기 집으로 밀레이를 초대합니다. 제자처럼 아끼는 밀레이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지요. 밀레이는 그곳에서 러스킨의 아내인 그레이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은인의 아내와 ‘금지된 사랑’
밀레이가 그린 러스킨의 초상화(1853~1854).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까맣게 모르는 듯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애슈몰린 박물관 소장잠깐 시간을 5년 전으로 돌려 봅시다. 1848년 영국의 한 교회, 29세의 러스킨과 19세의 그레이는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러스킨은 영국에서 이름 높은 지식인이었던 데다 얼굴도 잘생긴 편이었습니다. 그레이는 발랄한 성격의 매력적인 여성이었지요.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커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러스킨과 그레이의 결혼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 둘의 성격부터가 정반대였습니다. 러스킨은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그레이는 거침없는 외향적 성격이었거든요.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둘이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세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오늘날까지도 여러 추측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러스킨에게 육체적인 문제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 다였을지도 모릅니다.
1853년 밀레이가 그레이를 그린 스케치. 밀레이는 이 여자가 자신과 결혼할 줄 알았을까? 오른쪽 아래, 멋을 한껏 부리면서도 떨리는 듯한 서명 필체를 보니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을 법 하다.
'석방 명령'(1852~1863). 그레이를 모델로 여성의 얼굴을 그렸다. 그레이는 어머니에게 "내가 그림의 모델이 돼서 매우 기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림의 내용은 18세기 영국 내전 중 포로로 잡혔던 병사를 아내가 구한 이야기를 다룬다. /테이트그렇게 불행한 세월을 살던 그레이의 눈에 밀레이가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자꾸 보다 보니 괜찮은 사람 같았습니다. 얼굴도 잘생겼고 그림도 잘 그리는 데다 성격도 쾌활했거든요.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습니다. 마침내 그레이는 결혼생활 속사정을 밀레이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망설임도 잠시, 둘은 힘을 합쳐 법원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1854년 그레이와 러스킨의 결혼이 무효라는 판결을 얻어내고 맙니다. 이듬해 둘은 결혼했습니다.
육체적인 의미의 간통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의미론 불륜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물어뜯기 딱 좋은 가십거리였지요. 밀레이는 ‘은인 뒤통수를 친 불한당’, 그레이는 ‘남편을 배신한 천벌을 받을 여자’가 됐습니다. 러스킨은 ‘아내를 빼앗긴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뒤에서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따지고 보면 러스킨도 잘못이 있다”고요. 아내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애초에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어쨌거나 밀레이와 그레이의 금슬은 좋아서 자식을 8명이나 낳았습니다. 이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밀레이는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좀 상업적으로 바꿨습니다. 이를 본 비평가들은 “밀레이가 돈을 벌기 위해 예술과 타협하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밀레이의 '비누거품'(1886). 비누 회사 페어스의 광고 포스터 이미지이자 포장지로 쓰이면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한편 비평가들에게는 "지나치게 상업적"이란 비판을 받았다.
과거·현재·미래 중 중요한 건
여기까지는 흔한 막장 이야기인데, 결말은 좀 다릅니다. ‘그 사건’ 후 셋 다 행복했거든요.
러스킨은 적성에 안맞는 결혼에 집착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하며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일에 집중한 덕분에 러스킨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예술 비평가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습니다. 러스킨은 밀레이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몇 번 쓰기도 했습니다. 이전처럼 열렬한 찬사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호평이었습니다. 정말로 밀레이를 깊이 원망했다면 그러진 않았겠지요.
'낙엽'(1856). 스산한 가을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네 명의 소녀가 마당에서 끌어모은 낙엽을 태우고 있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과 무덤을 연상시키는 낙엽 더미가 타들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인 대비를 이룬다. 밀레이는 가을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낙엽 타는 냄새를 특히 좋아해 ‘지나간 여름의 향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작품의 소재로 즐겨 삼았다. 이 작품에서 낙엽 더미를 둘러싼 소녀들이 각기 짓는 표정은 삶과 죽음을 대하는 저마다의 태도를 상징한다. 왼쪽 끝의 소녀는 낙엽 태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고, 그 오른쪽에 있는 소녀는 움켜쥔 낙엽을 더미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그 옆의 소녀는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고, 손에 과일을 든 소녀는 낙엽더미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림은 소녀와 낙엽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소재를 통해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세련되게 드러내고 있다. 러스킨은 "황혼을 그림으로 완벽하게 표현한 첫 사례"라고 소개했다./맨체스터 시티 아트 갤러리 소장밀레이 역시 화가로서 승승장구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고, 훌륭한 그림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 자신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말년에는 귀족 작위도 받았고 지난주 소개한 프레데릭 레이턴 다음번으로 왕립예술원 회장도 지냈습니다. 그레이는 결혼 취소와 재혼 사건으로 명예가 실추되는 바람에 영국 왕실의 행사에 초대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좀 받긴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레이의 생활은 부유하고 행복했습니다. 밀레이보다 한 해 먼저(1828년) 태어난 그녀는 밀레이가 세상을 떠난 1년 뒤(1897) 잠듭니다.
'나의 첫번째 설교'(왼쪽)와 '나의 두번째 설교'(오른쪽). 자신의 딸을 모티브로 그린 이 연작은 큰 인기를 끌었다. 난생 처음 교회를 가서 설교를 들을 때는 긴장한 마음에 애써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 있었지만, 두번째 설교에서는 그만 잠들어버리고 만 아이다운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화가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도 잘 느껴진다.
에피 그레이의 초상화(1873). 그레이가 45세때 그린 그림이다. 당당하고 편안해 보인다./퍼스 박물관 소장“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다”. 그레이와 러스킨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사랑이든 직업이든 투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방향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주변의 시선이나 비난이 신경 쓰일 수도 있고, ‘본전 생각’이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과감하게 키를 돌려 자신의 길을 가는 게 행복의 지름길일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과거는 흘러갔고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나뿐이니, 스스로 떳떳하다면 방향을 틀어서라도 행복을 거머쥐어야지요.
'글렌 버남'(1890). 말년에 들어 밀레이는 '돈이 덜 되는' 풍경화에 천착했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해석이 많다. /맨체스터 아트 갤러리 소장그렇다면 현재와 미래 중엔 뭐가 더 중요할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밀레이는 ‘현재’라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이렇게 답했으니까요. “영원히 남는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지 마.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뭐 어때? 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칭찬하고 기꺼이 돈 주고 사면 좋겠어. 몇백년 뒤 사람들이 뭘 좋아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좋은 평가를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그때 난 죽고 묻혀서 먼지가 됐을 텐데.”(라파엘전파 동료였던 윌리엄 홀먼 헌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은 지금 밀레이의 그림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참 좋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현재에 충실하고 행복하면, 미래에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좋은 사례가 밀레이의 그림인 듯 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본문의 정보는 Robert Brownell의 저서 ‘Marriage of Inconvenience’, Jason Rosefeld의 저서 ‘John Everett Millais’, 옥스포드 미술사전, 테이트와 영국 내셔널갤러리를 비롯한 주요 미술관들의 홈페이지에서 참조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비혼주의자라더니 개뿔이. 결국 이 양반도 똑같은 남자구먼.”1895년 영국 런던의 한 미술관. 그림 앞에 선 관객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빵’ 터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을 그린 화가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비혼주의자’였거든요. 키 큰 미남인데 그림 실력도 천재적. 돈 많고 성격 좋고 사교성 좋은데다 노래까지 잘하니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나는 예술과 결혼했다”며 독신을 고수하던 남자였습니다.그런데 이 양반, 쉰 살 넘은 나이에 늦바람 든 걸까요. 나이 차이가 29살이나 나는 하류층 여성과 동거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연예계 사람들을 만나서 “이 아이를 배우로 써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다닌다네요. ‘그냥 모델일 뿐’이라지만, 이 그림을 보세요. 누가 봐도 화가가 모델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뻔히 보이잖아요.둘이 결혼이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그건 또 화가가 싫다네요. 사람들은 쑥덕거립니다. “하류층 여성이니 데리고 놀다 버리겠다는 심보인가? 여자만 불쌍하게 됐어.” “다 늙어서 주책이야, 정말.” 소문의 주인공은 영국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프레데릭 레이턴(1830~1896).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이 화가의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희대의 ‘엄친아’, 딱 하나 없었던 게…스캔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레이턴의 이미지는 ‘완벽 초인’이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부족한 게 뭐냐”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지요. 그럴 만도 했습니다. 먼저 태생부터가 금수저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러시아 황제(차르)의 의사로 일하며 돈을 많이 벌었고, 아버지도 의사였죠. 레이턴 본인은 키 큰 미남이었습니다. 게다가 인품도 훌륭했고, 사교성도 좋았으며, 술·담배도 안 했고,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각 나라의 언어를 마스터했고, 심지어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까지 잘했습니다. 그 많은 재능 중에서도 가장 빛났던 게 그림 그리는 실력이었습니다.전설의 시작은 1855년 여름 영국 런던 왕립예술원에서 열린 전시회였습니다. 전시 첫날 축사를 위해 전시장을 찾은 빅토리아 여왕. 의례적으로 전시작들을 둘러보며 영혼 없이 “너무 좋네요”를 반복하다가, 한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작품은 당시 25세였던 레이턴이 그린 ‘치마부에의 마돈나’였습니다. 여왕은 그 자리에서 거액을 지불하고 이 그림을 구입했습니다. 여왕의 그날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림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안 살 수가 없었다.” 불과 20대 중반에 영국 화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겁니다.너무 어린 나이에 최고가 된 레이턴.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미술계와 사교계의 스타가 됩니다. 그림 실력과 특유의 친화력, 겸손한 성품 덕분이었지요. 돈을 많이 번 건 물론이고, 34세였던 1864년에는 왕립예술원의 준회원이 되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주피터 올림포스’라고 불렀으니 말 다 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뜻도 있지만, ‘최고의 신에 비교할 만큼 완벽한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별명이었습니다.하지만 이 남자가 없는 게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배우자(애인)였습니다. 수많은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구애해도 레이턴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가 남성의 몸을 아주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사실이 그런 소문을 더욱 부추겼지요.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사실은 레이턴이 유일하게 좋아했던 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레이턴이 화가가 되는 걸 처음부터 못마땅해해서 아들이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둬도 좀처럼 인정하거나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이턴은 아버지가 인정할 만큼 성공하기 위해 쉴 틈없이 일했고, 자연스레 일에 중독됐지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엔 이렇게 ‘일과 결혼한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레이턴도 그런가 보네, 아깝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레이턴이 독신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게 됐습니다. 뒤늦게 만난 평생의 사랑그렇게 50대에 접어든 레이턴. 늦은 나이에 ‘평생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1881년 동료 화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모델을 서던 22세의 여성과 눈이 마주친 겁니다. 레이턴은 즉시 그녀를 자신의 그림 모델로 고용합니다. 자기 집 바로 옆에 그녀와 가족이 살 수 있는 집을 얻어주고, ‘도로시 딘’이라는 예명까지 지어 줬습니다. 그리고 둘은 항상 꼭 붙어 다녔습니다.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서로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레이턴의 친한 친구들이 편지에서 딘을 레이턴의 ‘아내’라고 지칭한 게 증거입니다. 또 레이턴은 딘이 갖고 있던 배우의 꿈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습니다. 연기 선생님을 붙여 줬고, 공연계 사람들에게 딘을 배우로 써 달라고 부탁했고, 활동비도 내 줬지요.당연히 언론과 호사가들은 ‘곧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레이턴은 “약혼하지는 않았다”는 말만 반복할 뿐,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그러자 뒷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집안 출신인 레이턴이 딘을 갖고 놀고 있다.” “딘만 불쌍하게 됐다.” “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 데리고 인형 놀이를 하는 것 같다.” 별별 조롱과 악담이 쏟아지는데도 레이턴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습니다.“레이턴이 딘의 곁을 지키면서도 침묵했던 건 사랑하는 여자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의 전기 작가 엘리앗 네게브와 예후다 코엔은 저서 <플레이밍 딘>에서 침묵의 이유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딘이 하류층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 배우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레이턴의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안 될 일. 지독하게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 기혼 여성이 배우로 일하는 건 쉽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딘이 꿈을 이루는 걸 도우면서도 커리어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레이턴으로서는 이런 식의 처신이 최선이었다는 얘깁니다.딘은 훗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0살이 넘었지만 레이턴은 내가 아는 가장 젊은 남자다. 그리고 가장 친절하고, 관대한 남자다.” 죽음, 그리고 잊혀지다60세를 넘어서면서 레이턴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일 중독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출장을 다니고, 그림을 그렸지요. 사는 방법이라고는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지병인 협심증이 도집니다. 그래도 레이턴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물론 작품의 주 모델은 딘이었습니다. 작업실에서 딘은 포즈를 취했고 레이턴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몇 달의 시간 동안, 둘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림이 대신 말할 뿐이었습니다.이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클리티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존재로, 태양의 신 아폴론을 짝사랑해 태양만 애달프게 바라보다 해바라기가 되어버린 님프(요정) 입니다. 인생의 해는 저물어가고, 석양 속 한 줄기 빛이 마지막으로 비치는 지금, “제발 사라지지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는 클리티에. 삶도, 예술도, 딘과의 사랑도 붙잡고 싶었던 레이턴의 애절한 마음이 그림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이 작품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레이턴은 1896년 세상을 떠납니다. 딘에게는 상속자 중 가장 많은 5000파운드의 유산을 남겼고, 딘의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별도로 5000파운드를 더 남겼습니다. 지금 한국 돈으로 따지면 15억원정도 되는 돈입니다. 하지만 레이턴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딘은 행복한 삶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3년 뒤 병에 걸려 불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거든요. 여기엔 레이턴에 대한 그리움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레이턴이 죽은 후 딘이 두 번 다시 화가의 그림 모델을 서지 않은 게 그 방증입니다.그리고 레이턴과 딘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 갑니다. 공교롭게도 레이턴이 사망한 직후 세계 미술계의 유행이 ‘개성적인 그림’으로 확 바뀌었고, 레이턴 식의 ‘잘 그린 그림’은 좋지 못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동안 이런 풍조가 계속되면서 기사 첫 부분에 나온 명작 ‘플레이밍 준’도 한때는 작품값이 액자값보다 저렴해지기도 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좀 생소한 미술관인 중앙아메리카 푸에르토리코의 폰세 미술관이 이 그림을 소장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남의 시선, 뭐가 중요한가다행히도 1960년대부터 레이턴의 작품세계에 대한 재평가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레이턴은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영국 화가로, 플레이밍 준은 ‘남반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세기의 명작으로 대접받게 됐습니다. 레이턴의 연인이자 배우였던 딘에 대한 관심도 커졌지요. 이에 따라 둘의 사랑 이야기도 재조명받게 됩니다.생전 둘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나이가 많이 차이 난다는 이유로 온갖 비난과 음해를 받았고요. 억울한 일들을 겪고 여러 손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후회는 없었을 겁니다. 서로 함께였기에 언제나 행복했으니까요.레이턴의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작품들을 기사로 소개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규칙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레이턴처럼 타인의 시각이나 편견을 어느 정도 무시해야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있습니다.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방향이 옳다고 확신한다면, 용기를 내서 그 길을 계속 가세요. 그렇다면 사랑이 됐든 일이 됐든, 그 길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을 것입니다.좋은 주말 보내세요.*기사 내용에 들어 있는 정보는 각 미술관 홈페이지, 엘리앗 네게브와 예후다 코엔이 쓴 책 ‘Flaming Dene :a victorian stunner’에서 참조했습니다.<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누구나 한 번쯤 학교 숙제를 깜빡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차례차례 앞으로 나가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를 받는 친구들. 내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얼굴은 화끈화끈 달아오릅니다. 괜히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고요. 칭찬받은 친구는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오고, 간신히 검사를 통과한 학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네요. 숙제를 깜빡했거나 엉망으로 해온 학생은 야단을 맞습니다. “손바닥 이리 내!”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한결 더 불편해집니다.300년 전 네덜란드의 학교도 분위기는 비슷했나 봅니다. 네덜란드의 장르화(=풍속화) 거장 얀 스테인(1626~1679)의 이 작품에는 아이들의 생생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엄한 표정으로 매를 든 선생님과 우는 아이를 비롯해 이 장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학생, 급하게 자신의 숙제를 다시 점검하는 학생, 뒤에서 열심히 숙제를 고치는 학생도 보이네요. 그런데 이 그림에서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듭니다. 100년쯤 뒤 조선의 단원 김홍도(1745~1806)가 그린 풍속화 ‘서당’과 구성이 쏙 빼닮았기 때문인데요.2023년 지금 교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요. 일단 회초리는 그림에서 빠지겠지요. 지금 한국과 네덜란드는 체벌을 금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모습은 별 차이 없을 듯합니다. 역시 사람 사는 건 언제 어디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스테인의 유쾌하면서도 사람 냄새 나는 그림을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집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스테인의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평범한 아저씨’가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유네덜란드 화가 하면 ‘빛의 화가’ 렘브란트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이들 못지않게 유럽에서 사랑받는 화가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스테인입니다. 그는 서민들의 삶을 아주 사실적으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그린 작품들로 유명합니다.그림 실력 하나는 미술사에 남을 정도로 대단했지만, 그걸 빼면 스테인은 사실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났고 인생에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성격도 평범했지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았고, 성격은 좀 못난 구석도 있었지만 대체로 유쾌한 편이었고,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들처럼요.스테인은 1626년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스테인은 스승 몇 명을 거쳐 풍경화 대가 얀 호이엔(1596~1656) 밑에서 수업받기 시작합니다. 지난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 다뤘던 ‘마이너스의 손’ 말입니다. 그리고 스테인은 스승의 딸과 사랑에 빠져 속도위반 결혼을 합니다. 그의 나이 23살이었습니다.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나는 인물도 잘 그리고, 풍경도 잘 그리고, 정물이나 동물도 잘 그리고, 원근법과 조명, 색을 모두 잘 다룬다.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 1등이 되기에는 실력이 살짝 부족해. 그렇다면…. 전부 다 그리면 되겠네.’그래서 스테인은 일상생활 속의 소소한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서양에서는 장르화, 우리나라에서는 풍속화라고 부르는 그 유형의 그림이지요. 아무렇게나 결정한 것 같지만 사실 이는 스테인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신의 한 수’였습니다. 그림 실력을 빼면 평범했고,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잘 이해했던 스테인.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오리가 ‘푸드덕’…아저씨는 못 말려스테인은 장르화가로 빠르게 명성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65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여파로 갑자기 그림 시장이 얼어붙었습니다. 그림만 그려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스테인. 양조장을 임대해 술 만드는 사업을 하기 시작합니다.하지만 양조장 사업 역시 잘 굴러가지는 않았습니다. 경기가 워낙 안 좋았던 데다, 스테인이 사업에 재미를 못 붙였던 탓이 컸죠. 기록에 따르면, 스테인을 보고 속이 터진 아내가 “가족은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냐! 이왕 하는 거 활기차게 좀 해봐!”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그런데 반응이 기가 막힙니다. “알겠다”며 일단 순순히 돌아선 스테인. 다음날 아내가 양조장에 들어서자, 아이고! 갑자기 뭔가가 푸드덕거리며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주위를 둘러본 아내. 양조장 술통에서 웬 오리들이 헤엄치고 있습니다. 스테인이 씩 웃으며 하는 말. “이제 좀 일터가 활기차지?” 썰렁하면서도 속 터지는, ‘아재 개그’ 그 자체죠.당연히 아내는 엄청나게 화를 냈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얀 스테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렇게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해학적인 그림들에는 이런 성격이 잘 반영돼 있습니다.스테인은 평생 성실히 그림을 그렸지만 벌이는 시원찮았습니다. 결코 스테인의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고, 17세기 중후반 네덜란드 경제가 워낙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장인인 호이엔을 비롯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렘브란트, 베르메르도 별로 살림이 넉넉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하지만 스테인과 가족들의 사이는 좋았습니다. 아이를 8명이나 낳았고요. 아이를 즐겨 그리고, 잘 그렸습니다. 그림만 봐도 그가 좋은 아버지였다는 게 느껴집니다.스테인은 따뜻한 이웃이자 좋은 친구기도 했습니다. 아래 그림의 사람들은 스테인의 이웃집에 살던 제빵사 부부입니다. 스테인은 갓 결혼한 이들을 위해 초상화를 그려 줬습니다. 당시에는 빵이 갓 구워져 나올 때마다 뿔피리를 불었는데, 뿔피리를 부는 소년은 당시 일곱 살이던 스테인의 아들입니다.스테인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과한 수준은 아니었고요. 어려운 사람에 대한 동정이나, 빈부 격차에 대한 아쉬움 등 보편적인 생각을 표현했지요. 아래 그림처럼요. 참고로 이 그림은 2004년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 1190만유로(약 165억원)의 가격으로 팔렸습니다. 벌써 19년 전 일이니까 지금은 훨씬 비싸겠지요.여러 가지 사회적 교훈을 담은 그림도 많이 그렸습니다. 아래 그림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 나온 ‘바람난 신부를 둔 신랑’입니다. 한 여관에서 열린 결혼식 피로연 모습을 담은 이 그림에서 신랑과 신부는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 앞에 서 있습니다. 신부의 배를 자세히 보면 약간 불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랑은 결혼식용 화관 대신 지푸라기가 꽂힌 초라한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 뒤에 있는 남자는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손을 대고 있고요. 신부가 바람을 피웠다는 뜻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둘을 바라보며 조롱 섞인 웃음을 띠고 있네요. 스테인은 ‘간통을 삼가라’는 교훈을 퍼뜨리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좀 평범하면 어때스테인은 53세가 되던 167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그는 생전 예술계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인지도나 평가는 렘브란트나 베르메르에는 조금 못 미치는 편입니다. 한때 미술계 일각에서 ‘작품이 진지하지 않고 산만하다’며 그의 작품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런 비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렘브란트나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잠시 숨을 멈추게 하는 감동을 스테인의 그림에서 기대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스테인의 작품이 뿜어내는 친근함도 매력적입니다. 모든 면에서 너무 완벽한 친구보다는 적당히 허술한 친구가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요. 스테인의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고, 재미가 있고,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그런 기분 좋은 에너지가 있습니다.사실 이는 장르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장르화가 나오기 전까지 서양에서는 종교나 신화, 역사 그림을 가장 훌륭한 그림으로 쳤습니다. 그다음이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였죠. 매일매일 반복되는 흔한 일상생활은 오랫동안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장르화 화가들은 일상 자체, 그러니까 평범한 삶에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봤습니다. 스테인이 장르화의 최고 거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림 실력만 빼면 그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자란 점도 많았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상과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았던, 그런 정감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근감 덕분인지 스테인은 오늘날 네덜란드 화가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화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수백년이 흐른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집이 엉망일 때 이런 표현을 쓰거든요. “얀 스테인의 집 같구먼(Huishouden van Jan Steen)!”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99% 폭락.처참한 투자 성적표를 본 화가는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지난 20년간 처자식 먹여 살려가며 틈틈이 모은 쌈짓돈 1억8000만원이 허무하게 증발해버린 겁니다. 좀 여유 있게 더 잘살아 보고 싶었을 뿐인데, 가족에겐 뭐라 말해야 할지, 앞으로 자식들 교육은 무슨 돈으로 시켜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다행히 화가는 돈을 꽤 잘 버는 편이었습니다. ‘수업료’ 냈다 치고, 이제부터 정신 차리면 됩니다. 하지만 잠시 후 기운을 되찾은 화가는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다음 투자에 성공해서 갚으면 되겠네!”이 못 말리는 ‘투자 중독자’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판 호이엔(1596~1656). 그림 실력으로는 렘브란트 뺨칠 정도의 거장이었지만 투자 실력은 형편없었던, 그래서 평생 빚에 시달렸던 ‘마이너스의 손’이었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호이엔의 작품과 삶에 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참고문헌과 금액 환산 기준 등은 기사 끝부분에 첨부했습니다. 그림 시장을 이끈 ‘천재 엘리트 화가’우리나라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호이엔이라는 이름이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잘 없고, 엉터리 정보도 많더군요. 하지만 유럽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풍경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호이엔이 살아있을 당시엔 같은 시대 화가인 렘브란트(1606~1669)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호이엔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남들이 빨라야 10대 중반에 시작하는 수습생도 불과 열 살의 나이로 시작했고요. 호이엔의 아버지도 ‘영재 교육’에 열심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습생은 길게 배울수록, 더 많은 수의 스승을 모실수록 교육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호이엔은 10년 넘는 기간 동안 6명 넘는 스승을 모셨습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었겠지요. 그들 중에서도 호이엔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20세 때 만난 ‘풍경화가 1타 강사’ 에사이아스 반 데 벨데였습니다.오랜 훈련을 마치고 마침내 풍경 화가로 본격 데뷔를 앞둔 호이엔. 이제 어떤 화가가 될지 선택해야 합니다. 당시 화가들은 둘 중 하나였습니다. 첫째는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천천히 걸작을 그리는 ‘장인 유형’, 두번째는 빠르게 많이 그려서 많이 파는 ‘공장 유형’이었지요. 재능이 있는 화가들은 보통 장인이 되기를 택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 공장 유형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호이엔은 공장 유형을 택했습니다.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의 상업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걸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늘었지요. 수요는 급증하는데 공급이 못 받쳐주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호이엔이 빨리, 많이 그려내는 합리적인 가격의 작품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호이엔의 속도와 ‘가성비’는 스승 반 데 벨데에게서 배운 기술 덕분이었는데요, 그는 바탕을 얇게 칠하고 그 위에 몇 가지 색만 슬쩍슬쩍 칠해서 물감을 아끼고 그리는 시간도 최대한 줄였습니다.가장 중요한 건 호이엔의 그림이 아름다웠다는 겁니다. 이는 호이엔의 실력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쓴 색을 하나하나 보면 대부분이 칙칙한 색이고, 어떤 색은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붓 터치도 하나씩 뜯어보면 큰 감동이 없고요. 하지만 호이엔은 그 별것 아닌 것들을 모아 이런 멋진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투자는 번번이 ‘쪽박’…‘마이너스의 손’이렇게 성공 가도를 걷던 호이엔은 1636년 어느 날 이상한 얘기를 듣습니다. 얼마 전 동방에서 들어온 튤립이라는 꽃이 있는데, 이 꽃을 사면 누구든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튤립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피식 비웃고 넘어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갑니다. 친척 누구는 튤립 거래로 떼돈을 벌어 은퇴했다고 하고, 옆 동네 누구는 튤립을 판 돈으로 집을 몇 채나 샀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수습생 녀석들도 튤립 얘기뿐. “지금 안 사면 바보”라나요. 호이엔은 ‘벼락 거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그러고 보니 어느새 화가로 살아온 지 20년은 된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캔버스와 씨름하는 고단하고 단조로운 생활. 큰 불만은 없었지만, 좀 더 여유 있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해가 바뀐 1637년 1월 27일. 호이엔은 큰맘 먹고 지인에게 튤립 뿌리 9개를 수천만 원에 샀습니다. 처음엔 불안했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꾸준히 오르기 시작하는 가격에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가즈아~!” 그는 일주일 뒤인 2월 4일 1억원어치 튤립 뿌리를 ‘추가 매수’ 합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전날인 2월 3일, 튤립 거래의 중심지였던 하를렘에서는 이미 시세 폭락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상투를 잡은 겁니다. 값비싼 투자 상품이었던 튤립은 한순간에 그저 흙 묻은 풀때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인 ‘튤립 파동’입니다.당시 네덜란드는 유럽의 모든 돈이 몰리는 곳. 돈이 많아지니 사람들은 이 돈을 넣을 투자처를 애타게 찾아 헤맸습니다.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게 얼마 전 동방에서 들어온 ‘신비의 꽃’ 튤립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튤립 모양에 이름을 붙이고 등급을 매기며 신나게 사고팔기를 반복했고, 튤립 값은 불과 몇 달 만에 10배, 100배로 뛰었습니다. 시세 폭등에 이끌린 사람들이 더 들어오면서 가격은 계속 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그저 꽃일 뿐인데 왜 이 돈을 주고 사야 하지?” 그리고 이어진 폭락.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 같네요.사실 아직은 상황이 괜찮았습니다. 비록 큰 손해를 보긴 했지만, 호이엔은 여전히 안정적으로 고수익을 올리는 훌륭한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튤립 파동 이후 변해버렸습니다. 튤립 가격이 오를 때의 그 짜릿함과 행복감에 중독돼 버린 거지요.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큰 손해를 봅니다. 막대한 빚, 다 갚긴 했는데…이후 그의 행보를 세 가지 포인트로 정리해 봤습니다.①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 튤립 투자 실패와 부동산 투자 실패로 16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쪼들리기 시작한 호이엔. 그의 저력이 발휘됩니다. 그는 정말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652년 그는 거의 하루에 한 점꼴로 그림을 그리고 팔아서 3억원 넘는 연수익을 거뒀습니다.결과적으로 호이엔의 삶을 통틀어 가장 성공적이었던 투자는 ‘자신에 대한 투자’였습니다. 이는 “역사상 최고의 투자는 자기 계발”이라는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의 말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일에 대한 숙련도야말로 인플레이션을 방어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숙련도에는 세금도 매기지 않는다. 당신이 정말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화폐 가치가 어떻게 되건 경제의 일정 부분을 가져갈 것이다.”②끊임없이 변화하라. 호이엔의 방식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화가들의 모방에 약하다는 겁니다. 그가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 해도, ‘장인 유형’의 화가들이 몇 년을 바쳐 그린 작품만큼 완성도가 높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호이엔의 화풍을 베끼는 사람들이 늘었고, 이들은 비슷한 그림을 더 싼 값에 내놨습니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화풍을 끊임없이 바꿨습니다. 시골 마을을 그리다가 경쟁자가 늘어나면 강과 바다를 그렸고, 또 비슷한 작품이 시장에 늘어나면 호숫가 마을 풍경을 그리고…. 마치 글로벌 1등 기업이 후발 주자를 따돌리듯 새로운 주제와 기법을 발굴해냈습니다. ‘투자 중독’이긴 했지만, 그는 정말로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돈 벌려고 그린다’는 마인드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니까요.③잘 하는 걸 하자. 확실히 호이엔은 그림에서만큼은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투자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1656년, 그의 빚은 18억원에 달했습니다. 다행히도 이 빚은 그가 남긴 재산으로 다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사들인 집 6채는 총 15억6700만원에 팔렸고, 남긴 그림들과 물건이 2억4150만원에 팔렸거든요. 호이엔이 평생 남긴 그림은 확실히 기록된 것만 해도 1200점. 실제 그린 그림은 더 많을 겁니다. 이렇게 열심히 그린 덕분에 이자를 내고 ‘적자 인생’을 면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이엔의 그림은 그가 죽은 뒤 금세 유행에 뒤처진 작품이 됐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시장에 그림이 너무 많이 풀린 탓에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하찮게 여기기 시작했거든요. 호이엔이 재평가된 건,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보다 독창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20세기에 들어선 뒤였습니다.호이엔의 그림은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합니다. 죽은 뒤지만 어쨌거나 빚도 다 갚았고, 열심히 살아서 자식들도 나름대로 잘 키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과 인생을 살피다 보면, ‘더 잘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그렇게 재능도 뛰어나고 성실했는데, 튤립 파동 때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림에만 집중했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 렘브란트보다 호이엔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독자 여러분 중에서도 지난 몇 년간 자산 상태가 많이 달라진 분이 적지 않으실 겁니다. 투자에 성공해 큰돈을 버셨다면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주식으로 적잖은 손실을 봤거나, ‘영끌’해서 산 집값이 내려갔거나, 하다못해 ‘벼락 거지’가 되는 등 상황이 안 좋아진 분들이 더 많을 듯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것부터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이 생기겠지요. 저도 이렇게 토요일 새벽에 기사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주말 잘 쉬시고, 돌아오는 한 주도 모두 힘내시길 바랍니다.*지금 호이엔에 대한 한국어 정보 중에서는 부정확한 게 많습니다. 이 기사 속 정보 대부분은 ‘네덜란드 예술 역사가 저널’(JHNA)에 게재된 ‘얀 판 호이엔 : 거장, 혁신가, 시장 리더’에서 따왔습니다. 원문은 1996~1997년 네덜란드 라이덴의 라켄할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호이엔의 대규모 전시 도록에 실려 있었고, 에릭 얀 슬루이터 암스테르담대 명예교수가 작성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호이엔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JHNA 홈페이지에서 영문으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옛날 돈의 가치를 지금 돈으로 계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폐(길더) 가치를 얼마로 환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연구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적게는 3만원, 많게는 10만원이 넘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편의상 1길더=10만원으로 계산했습니다.<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