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와 해초가 블랙푸딩으로…韓·英 스타 셰프가 만든 마법의 맛
셰프들은 그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렸다. 코로나가 끝나기를. 올해 다이닝 신의 트렌드는 그렇게 ‘컬래버레이션(협업)’이 됐다. 해외 유명 셰프들은 줄지어 한국을 찾는다. 디너 이벤트를 위해 한국을 찾은 셰프와 스태프들은 낯선 땅의 주방에서 손을 맞추고, 머리를 맞댄다. 분주한 일정 속에 이들은 서로의 기술과 경험을 나누며 새로운 자극을 주고받는다. 셰프와 키친팀, 홀팀은 짧은 일정 속에서 진한 우정을 나눈다. 아카데믹한 교감은 물론 문화적 소통이 핵심이다. 그런 에너지는 고스란히 다이닝을 즐기는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짜릿한 미식의 향연으로 이어진다.

봄볕의 햇살이 따사로운 3월의 둘째 날과 셋째 날, 서울과 런던의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 뭉쳤다. 밍글스(Mingles·서울)와 이코이(Ikoyi·런던)가 4년 만에 다시 만난 것. 2019년 런던에서 함께한 첫 번째 콜라보의 속편으로, 진화된 두 번째 이야기를 선보였다.

1년 만에 미쉐린 스타 된 런던 이코이

고등어와 매실된장, 호박씨 미소
고등어와 매실된장, 호박씨 미소
이코이 레스토랑은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 제러미 찬과 이레 하산-오두칼레가 2017년 함께 세운 레스토랑이다. 런던의 헤스톤 블루멘털에서 경력을 쌓고 있던 제러미 찬과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던 하산-오두칼레가 합심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하산-오두칼레는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제러미 찬은 영국 북부 출신이지만 미국과 아시아, 특히 홍콩에서 성장하며 동
한우구이와 모렐 만두
한우구이와 모렐 만두
양의 맛을 잘 표현하는 셰프가 됐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서아프리카 식재료에 홍콩과 일본 등 동양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을 결합한 음식들은 이코이의 색을 점점 더 선명하게 했다. 이코이는 2017년 개점 후 1년 만에 미쉐린 1스타를 거머쥐었고, 2022년 2스타 레스토랑으로 올라섰다.

이코이는 공동창업자이자 경영을 맡고 있는 하산-오두칼레의 고향인 나이지리아의 항만 도시 라고스의 한 마을 이름이다. 영국의 신선한 농산물과 식재료에 서아프리카 식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진보적인 요리를 선보여 미식가들을 사로잡았다. 2019년 이코이를 방문했을 당시에도 쉽사리 경험하지 못했던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서아프리카의 향신료가 요리 전방위에 사용된 기억이 떠오른다. 그것이 토속적이고 클래식한 서아프리카 전통 음식이었다면 실망했을 터. 하지만 그날 코스 안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맛봤다. 스스로 쳐놓은, 음식에 대한 기호의 장벽을 깨부순 날이었다고 해야 할까.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에 그저 감동한 기억이 남아 있다.

모던 코리안의 대표주자 ‘밍글스’

플란틴, 호박 고구마와 고추장
플란틴, 호박 고구마와 고추장
그런 그들이 한국을 찾아 두 번째 콜라보 디너를 펼친다는 소식에 무작정 달려갔다. 첫날은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내 ‘페스타 바이 민구’에서, 둘째 날은 밍글스 레스토랑에서 행사가 열렸다. 11가지 코스 요리로 진행된 이 이벤트에는 특히 해외 셰프도 여럿 참석했다. 코로나 기간 만나지 못했던 반가운 마음들이 더해져 식사하는 내내 이곳이 서울인지, 런던인지, 대만인지 헷갈릴 정도의 흥분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한국식 블랙푸딩, 발효한 고추와 해초
한국식 블랙푸딩, 발효한 고추와 해초
밍글스 레스토랑 역시 이코이 런던과 마찬가지로 이제 10여 년의 세월을 채워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모던 코리안이란 장르 속에 고군분투하던 강민구 셰프의 요리는 점진적으로 발전해 이제 자신만의 색깔이 또렷해졌다. 한국의 파인다이닝 중 밍글스만큼 해외 셰프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곳도 많지 않다. 밍글스는 홍콩에 레스토랑 한식구를 열었고, 최근에는 캐주얼 와인 바 뱅글도 선보였다. 굵직한 해외 레스토랑과 많은 협업을 해온 밍글스가 지키는 룰이 있다. 강 셰프가 말하는 기준은 이렇다. “첫째, 우리의 철학과 비전이 공유되고 서로 배움을 나눌 수 있는 레스토랑인가? 둘째, 한국의 식문화를 경험하고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인가? 물론 반대로 밍글스 또한 그런 열린 마음과 자세가 돼 있는가?”

“콜라보의 기준, 함께 성장할 수 있는가”

랑구스틴, 와일드 라이스와 이스트 베어네즈
랑구스틴, 와일드 라이스와 이스트 베어네즈
이코이 런던 팀들이 1주일간 업장 영업을 포기하고 서울로 날아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 이벤트가 아니라 서로 발전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던 것. 이번 콜라보 다이닝에서 선보인 11가지 코스 요리는 단순히 각자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를 번갈아가며 선보이는 형식이 아니었다. 두 셰프가 머리를 맞대고 두 레스토랑, 더 나아가 두 나라의 식문화를 대변하는 요리들을 매만져 내놓았다. 이코이 런던의 시그니처 메뉴인 플란틴(바나나를 닮은 채소)을 호박고구마와 고추장으로 해석해 선보인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국식 블랙 푸딩, 발효한 고추와 해초 디시 또한 어떤 경계나 한정된 틀이 없는 자유로운 맛과 프레임을 선택한 메뉴였다.

페어링된 와인들의 섬세한 라인업은 미식의 경험에서 와인, 전통주 등 주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일깨워주는 지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이 두 레스토랑의 앞으로 행보가 더 궁금하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넘치는 청년의 에너지에서 이제 노련함까지 갖춘 두 셰프의 작품을 마주한 이들은 “앞으로도 부지런히 새로운 맛의 여정을 떠나야겠다”는 다짐까지 할 정도였다.

김혜준 푸드콘텐츠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