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를 반에 반의 반도 몰랐다
“남극은 다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에요. 눈보라가 치면 한 치 앞이 안 보여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고, 그럴 때는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의지해 한 발씩 겨우 내디딜 수 있거든요.”

최근 10년 만에 소설집 <반에 반의 반>을 출간한 천운영 작가(사진)는 지난 10일 서울 내자동의 한 카페에서 “가장 추운 곳에서 좀 더 다정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나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천 작가는 10년 사이 남극을 세 번 다녀왔다. 처음은 소설가로서, 그 뒤는 다큐멘터리 제작자, 생물학자로서. “소설이란 세상을 먹고 소화시켜 싼 똥”이라는 그의 표현대로 이번 책은 10년간의 세월이 녹아든 결과물이다.

‘다정함’을 찾아 그가 닻을 내린 곳은 ‘명자’와 ‘길현’. 각각 실제 천 작가의 어머니와 할머니 이름이다. 소설집 수록작 총 9편에는 명자와 길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여성이 여러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후취 시어머니를 돌보고 또 가르치는 길현(수록작 ‘우니’), 색출과 처형이 반복되던 6·25전쟁 와중에 “우리 동네에 내 떡 맛, 안 본 사람이 있가니?” 하며 그간 쌓아둔 인심으로 가족을 지켜내는 길현(반에 반의 반)…. 세부 설정은 조금씩 달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지켜낸다. 혈육이 아닌 남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다정함이 그들의 무기다.

그렇다고 마냥 온순하기만 한 여자들은 아니다. ‘아버지가 되어주오’ 속 명자는 아홉 살 많은 남자와 혼전임신으로 결혼해 가족을 위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한다. 명자는 자신을 ‘가부장제의 희생양’으로 여기는 딸을 향해 “넌 네 엄마 인생이, 그렇게 정리되면, 좋겠니?” 하고 일갈한다.

소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엄마를 반에 반의 반도 모른다.” 천 작가는 치매에 걸린 자신의 어머니를 ‘취재’해 이 작품을 썼다. “엄마의 첫 데이트 얘기를 캐물으면서 몰랐던 표정을 봤어요. 그래도 그 시절이 재밌었나보다 싶고…. 소설을 통해 엄마가 역사가 됐으니 써두길 잘했다 싶어요. 나는 엄마의 엄마인 것처럼 엄마를 사랑하거든요.”

길현, 명자, 그리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름을 붙이지 않은 다음 세대의 여자까지. 소설 속 여자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 보니 늙은 여자의 젖퉁”이라는 ‘작가의 말’은 20년 넘게 ‘여성의 몸’을 탐구해온 천운영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그의 2000년 등단작 ‘바늘’은 바늘을 여성의 성기에 빗대 생명과 힘의 근원으로 그려낸다.

천 작가는 “이제 여성의 몸에 관한 서사는 쓸 만큼 쓴 것 같다”며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가 보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올해 남극에서의 경험을 녹여낸 동화를 출간할 예정이다. 남극 기지를 배경으로 추리소설도 써보고 싶다는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올해 겨울 남극 장보고과학기지를 지킬 월동대원 모집이 15일까지인데…” 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 소설집 마지막 순서에 실린 ‘작가의 말’은 이렇게 끝맺는다. “나는 오래 쓸 것이다.”

글·사진=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