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가 "스탈린은 생각보다 훌륭한 지도자였다"
"스탈린은 매우 유능한 지도자로, 처칠 히틀러 루스벨트 등 비슷한 시기 다른 국가의 군사 지도자 중 유일하게 대체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영국 출신의 소련 및 스탈린 전문가인 제프리 로버츠가 쓴 <스탈린의 전쟁>은 이처럼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스탈린이라는 존재가 후임자인 흐루시초프의 평가절하와 냉전 기간 대립으로 왜곡됐다고 주정한다.

그리고 이는 2차 세계대전 및 냉전 돌입 시점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한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스탈린과 관련된 잘못 알려진 사실 관계들을 바로 잡으려 시도한다.

"히틀러의 진격에도 스탈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독일과의 전쟁 초기 스탈린은 크게 동요한 것으로 일반에 알려져 있다. 충격에 빠져 며칠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측근들이 찾아가 설득했을 때 겨우 기력을 차리고 지휘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저자는 관점이 흐루시초프를 통해 왜곡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스탈린은 여느 때처럼 일했고 분별력을 잃지 않았다."(몰로토프)는 등의 반대 증언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련 논쟁은 스탈린 사후 스탈린 반대파와 충성파 사이의 갈등으로 과장됐다는 지적이다.

상반되는 진술 사이에서 저자는 전쟁 초기 소련 내 공식 결제 문건 등을 통해 스탈린이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독소 전쟁 발발 당일 스탈린이 직접 명령하고 서명한 20건의 문서다. 여기에는 초기 전쟁 수행기구 구성과 보급체계 변화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됐다.

냉전이 스탈린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점도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독일과의 전쟁이 길어지고 잔혹해지면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평화에 대한 요구는 소련과 스탈린에게 더 컸다는 것이다.

저자는 종전 후 서구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이 양보했던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폐지하기로 한 것이 단적인 예다.

당시 코민테른은 소련 이외의 다른 국가에 혁명을 수출하는 역할을 했다. 2차대전 종전 후 소련이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도모할 것이라는 우려가 연합국의 일원이던 미국과 영국에 퍼질 것을 두려워한 스탈린이 조기에 코민테른의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소련군이 동유럽을 석권한 가운데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영국에 양보했다는 점도 '평화를 위한 스탈린의 노력' 중 하나로 든다. 지리적으로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스탈린이 영국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제했다는 것이다.

이 연장선에서 스탈린은 그리스 내에서 사회주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지원을 거부했다.

스탈린의 잔혹함은 전쟁 승리의 기반

아울러 저자는 널리 알려진 스탈린의 잔혹함이 2차 세계대전 승리의 조건이 됐다고 말한다. 히틀러 침공이 초래한 혼란에도 소련 지도부가 흔들리지 않았던 근저에는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이다.

"측근들은 스탈린을 두려워했고 위압 당했다. 관리되고 조정되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스탈린에 매료되고, 개인과 가족에 대한 스탈린의 배려에 매혹됐다.

이는 좋을 때나 궂을 때나 함께 뭉치도록 했고,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도 배신을 꿈꾸지 못하게 했다. 어떤 식으로든 스탈린은 측근 그룹 내에 응집력과 충성심을 조직했다."

국가운영 과정이 무자비함도 마찬가지다. 악명 높은 독전대를 동원한 후퇴자들에 대한 처형 등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주요 전장에서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이같은 잔혹함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스탈린이 실패를 통해 학습하고, 발전하며 적절히 통제됐다고 평가한다. 스탈린은 하르코프 참사를 비롯한 군사적 실패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으며, 과장된 것에 비해 단순히 패배했다는 이유로 장군들을 처벌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후퇴명령을 거부해 군사적 재난을 자조했던 히틀러와 비교해, 스탈린은 퇴각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포로와 사상자를 최소화시킬지 일선 사령관들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스탈린은 전쟁 승리를 위해 전투와 군사부터 이념, 경제까지 챙겼다.

전쟁 초기 소련이 사회주의화를 추구하며 금기시했던 민족주의를 고취시킨 것도 인민 동원을 위한 스탈린의 세심한 설계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1943년 장교를 뜻하는 '오피체르' 단어를 부활시키고 장교복을 따로 지급하는 등 다양한 판단도 직접 결정했다.

60대로 전쟁 내내 하루 12~15시간 일했던 지도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난다.

두달만에 독일 굴복시킬 것으로 봤던 착각

책이 스탈린의 관점에서 쓰여진만큼 과거에는 조명되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도 자주 발견된다.

우선 독일과의 전쟁을 예상한 소련 지도부가 전쟁이 두 달 만에 소련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는 것이다. 소련군은 1930년대초 100만명 이하이던 것이 전쟁을 앞두고 500만명까지 불어나 충분히 독일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오히려 기습의 이점이 끝나는 수개월 후에는 소련군이 동프로이센과 남부 폴란드 등으로 진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같은 낙관주의는 독소전이 시작된 1941년 뼈아픈 패배를 경험하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킨 이후 소련은 독일의 주력이 소멸했다고 판단해 전쟁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봤다. 스탈린은 1941년 10월 "1942년에 나치군이 완전히 패배할 것으로 보장한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스탈린이 마르크스주의의 도그마에 빠져 여러 판단 오류를 범한 것도 흥미롭다.

독일의 전쟁 준비가 본격화되며 관련 첩보가 쇄도하는 가운데에도 독일의 전쟁 의지를 과소평가한 것이 단적인 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따라 독일 자본주의는 소련과 교역을 선호하는 자본가 집단과 팽창을 원하는 군사 집단 사이의 분열이 커 쉽게 전쟁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독일은 완전히 장악했던 당시 상황과 동떨어진 판단이었다.

추축국 처리를 놓고도 비슷한 오류를 범했다. 스탈린은 전쟁이 끝난 뒤 서방이 독일과 일본 산업의 완전한 파괴를 지지할 것으로 믿었다.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의 무역 경쟁국을 제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세계사적 흐름이 결국 사회주의로 수렴할 것이라는 스탈린의 그릇된 믿음은 서방 국가들에 도움이 됐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1000만명을 상회하는 소련군이 유럽 내 가장 큰 군사세력이 됐음에도 무력을 동원한 추가 팽창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에 지나친 실드는 아닌지

여러 역사적 사실들의 이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다만 스탈린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불식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강해서인지 스탈린을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종종 있다.

독일과 전쟁 초기 재앙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인 스탈린의 대규모 숙청과 관련해 "숙청된 이들이 (그들의 대체자들보다) 훨씬 더 잘 했을지에 대한 의문은 추측의 영역"이라고 규정한다. 독일과 유럽에서 펼처진 소련군의 악명 높은 대규모 강간에 대해서도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당시 소련군의 강간이 일으킨 파장과 정치적 충격을 과장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같은 점들을 감안할 때 책은 스탈린 체제와 독소전에 대해 배경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읽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물론 저자는 친절한 설명과 각주를 통해 초심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

다만 이같은 친절한 설명은 내용이 장황해 보인다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흐루시초프를 '흐루쇼프', 독일군을 '베어마흐트', 소련군을 '붉은 군대'로 계속 표기하는 등 번역과 관련된 의문도 있다. 책의 목차를 보고 관심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발체독하기를 권한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