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JTBC '재벌집 막내아들
사진=JTBC '재벌집 막내아들
지난 25일 인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16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결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만, 한국 최고 재벌의 창업주 진양철 회장 역을 맡은 배우 이성민의 신들린 연기력이 빛났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진양철 회장이 한국 경제계 일인자로 등극하게 된 내용을 프리퀄(본편 이전 이야기) 드라마로 보고 싶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배우의 연기력과 진양철 회장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그만큼 뛰어났기에 나오는 반응이죠.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프리퀄(본편 이전 이야기) 제작을 원하는 팬이 만든 포스터. /인터넷 커뮤니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프리퀄(본편 이전 이야기) 제작을 원하는 팬이 만든 포스터. /인터넷 커뮤니티
뛰어난 사업가가 성공을 거두는 스토리는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배경의 젊은이가 자신의 지혜와 열정, 용기와 끈기로 거대한 부를 일궈내는 얘기니 배울 점도 많고요. 권력과의 유착, 다른 기업과의 경쟁과 암투, 후계 구도를 둘러싼 투쟁 등도 흥미를 돋웁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 중 하나로 불리는 독일의 야코프 푸거(1459~1525)의 삶도 그렇습니다. 농부의 손자로 태어난 그는 현재 가치로 500조원 넘는 부를 쌓았습니다. 돈의 힘으로 남부 독일을 다스리는 백작까지 됐지요. 그가 돈을 굴릴 때마다 전 유럽의 정세가 흔들렸고, 영향력은 황제와 교황을 바꾸고 국경을 새로 그을 정도였습니다. 이 모든 얘기를 ‘그때 그 사람들’ 2회에 걸쳐 풀어보겠습니다.

‘중견기업 막내아들’의 탄생

외르크 브로이의 '아우크스부르크 월례노동화'(1531) 당시 유럽 직물산업의 중심지로 활기가 넘쳤던 아우크스부르크의 풍경이 잘 묘사돼 있다. /독일역사박물관
외르크 브로이의 '아우크스부르크 월례노동화'(1531) 당시 유럽 직물산업의 중심지로 활기가 넘쳤던 아우크스부르크의 풍경이 잘 묘사돼 있다. /독일역사박물관
1373년 어느 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시청에 비루한 차림의 젊은이가 쭈뼛대며 들어옵니다. 얼굴은 햇볕에 까맣게 그을렸고, 옷에서는 촌티가 풀풀 납니다. 공무원은 생각했습니다. “한몫 잡아보려는 촌놈이 또 하나 왔구만.” 청년의 말은 예상을 빗겨나가지 않습니다. “저…전입 신고를 여기서 하면 되나요?”

몇십년 전만 해도 유럽 직물 생산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섬유·패션 산업은 지금도 유명하죠. 그런데 이때는 달랐습니다. 14세기 중반 전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이탈리아가 쑥대밭이 되고 만 겁니다. 이탈리아가 몰락하자 기적적으로 흑사병 유행을 빗겨 간 아우크스부르크가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전 유럽의 직물 수요가 이곳에 몰렸고, 막대한 돈이 돌았습니다. 청년처럼 일확천금의 꿈을 좇아 가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죠.

“이름.” 공무원이 물었습니다. “한스 푸거입니다.” 공무원은 잠시 고민합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공문서에 라틴어를 썼는데, 푸거를 라틴어로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한 거죠. 잠시 후 공무원은 이렇게 적어 내려갑니다. ‘F-U-C-K-E-R’. 라틴어로는 푸케르지만 영어로는 욕설이죠. 문서보관소에는 아직도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Fucker 왔다 감.’

시작은 좀 어설펐지만, 청년은 금세 도시 생활에 적응해 성공적인 사업가로 변신합니다. 이름 철자도 Fugger로 제대로 고쳤고요. 똘똘한 젊은 사업가를 눈여겨본 숙련공 조합의 조합장이 자기 딸을 소개해 주면서 그의 사업은 더욱 튼튼해집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사업을 물려받은 아내와 아들, 며느리도 회사를 잘 키워나갔습니다. 이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숙련공들이 짠 옷감을 무역의 중심지인 베네치아에 내다 팔아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하면 탄탄한 중견기업 정도는 됐죠.

그리고 1459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야코프 푸거가 태어납니다. 푸거의 부모님은 금슬이 아주 좋았나 봅니다. 아이를 10명이나 낳았으니까요. 푸거는 7남 3녀 중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독일의 '국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푸거를 묘사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독일의 '국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푸거를 묘사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황제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구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프리드리히 3세. 그 자신은 여러모로 무능했지만, 막시밀리안 1세라는 훌륭한 아들을 뒀고 그 아들을 브루고뉴 공작 집안의 딸과 결혼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훗날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계를 지배하는 기틀이 된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프리드리히 3세. 그 자신은 여러모로 무능했지만, 막시밀리안 1세라는 훌륭한 아들을 뒀고 그 아들을 브루고뉴 공작 집안의 딸과 결혼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훗날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계를 지배하는 기틀이 된다.
열세 살이던 1473년, 푸거는 아주 인상 깊은 일을 겪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와 그의 아들이 옷을 사러 푸거 가문을 방문한 겁니다.

황제는 혼인 동맹을 맺기 위해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당시 부르고뉴 지방은 유럽에서 제일 부자 동네였고, 동서가 될 공작은 엄청난 멋쟁이로 유명했죠.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나와 아들도 좋은 옷을 입어야겠는걸. 가는 길에 마침 옷으로 유명한 아우크스부르크가 있으니 들러서 옷을 좀 사야겠다.” 황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황제는 돈을 헤프게 쓰기로 유명했습니다. 빚을 떼먹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상인들도 이런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옷을 살 돈이 없네. 빌려주면 꼭 갚겠네.” 황제의 호소에도 아우크스부르크 상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구세주로 나선 게 푸거 가문입니다. “저희가 옷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돈은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황제 폐하가 저희 옷을 입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광고가 됩니다.”
푸거 가문이 황제로부터 수여받은 문장./위키피디아
푸거 가문이 황제로부터 수여받은 문장./위키피디아
“정말 고맙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 황제는 평민에 불과한 푸거 가문 사람들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푸거 가문의 문장을 수여합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어린 푸거,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황제도 평민인 나처럼 돈 앞에서 굽실대는 똑같은 인간이구나.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그리고 황제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겠다.

푸거, 사업 전선에 뛰어들다

원래 부모님은 푸거를 성직자로 키울 생각이었습니다. 아들 일곱 명 중 네 명은 일찍 죽었지만, 사업을 맡길 아들은 여전히 푸거 말고도 둘이나 있었죠. 그런데 황제 방문 이듬해인 1474년, 부모님은 마음을 바꿔 푸거를 수도원으로 보내지 않고 가업을 이어갈 기회를 주기로 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만남을 계기로 푸거의 재능이 각성했을지도 모르죠.

푸거는 세계 최고 상업도시인 베네치아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전 세계의 귀중품과 돈이 몰리는 최고의 상업 도시였습니다. 프랑스산 포도주가 알렉산드리아(현재 이집트)와 콘스탄티노플(현재 튀르키예)행 무역선에 실리는 곳,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상인들이 후추·생강을 뿔·모피·금속과 바꾸는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특히 베네치아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지역 경제는 엄청난 호황을 구가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전에 나온 틴토레토의 '갑옷을 입은 남자'. 사람과 물건이 오가는 곳엔 돈이 모이고, 돈이 있는 곳에서 예술은 태어난다. 중세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그런 장소였다. 해상 무역으로 쌓아올린 막대한 부, 지중해의 화사한 풍광, 다양한 문화권과의 교류, 향락적인 분위기는 예술이 꽃을 피우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토양이었다. 틴토레토(1519~1594)와 티치아노, 베로네세 등으로 대표되는 ‘베네치아 화파’가 풍부하면서도 섬세한 빛과 색채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전에 나온 틴토레토의 '갑옷을 입은 남자'. 사람과 물건이 오가는 곳엔 돈이 모이고, 돈이 있는 곳에서 예술은 태어난다. 중세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그런 장소였다. 해상 무역으로 쌓아올린 막대한 부, 지중해의 화사한 풍광, 다양한 문화권과의 교류, 향락적인 분위기는 예술이 꽃을 피우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토양이었다. 틴토레토(1519~1594)와 티치아노, 베로네세 등으로 대표되는 ‘베네치아 화파’가 풍부하면서도 섬세한 빛과 색채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푸거 가문처럼 당시 유럽 각지의 상인 가문들은 자식들을 베네치아에 보내 무역업을 배우게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베네치아 상회에서 수입과 수출, 상자 포장, 편지 필사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서로 친해지며 인맥을 쌓았습니다. 푸거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당시 선진 회계기법이었던 복식부기를 배워온 겁니다. 당시만 해도 독일 상인들은 자금 흐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장사를 주먹구구식으로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금 흐름을 추적할 수 있고 투명성이 높은 복식부기는 평생 푸거의 강력한 무기가 돼줬습니다.

5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푸거는 형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합니다. 출장을 다니고, 각종 의상·직물 박람회를 방문하고, 지점을 감독하며 경험을 쌓았죠. 그리고 26살이 되던 1485년 광산업 부문을 맡아 오스트리아의 은광 도시 슈바츠로 향하면서 그의 본격적인 성공 신화가 시작됩니다.
푸거가 소유했던 은 광산과 구리 광산에서의 작업을 보여주는 목판화들(1556). 푸거는 이들 광산에서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유니버설 히스토리 아카이브
푸거가 소유했던 은 광산과 구리 광산에서의 작업을 보여주는 목판화들(1556). 푸거는 이들 광산에서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유니버설 히스토리 아카이브
당시 슈바츠는 합스부르크 집안의 대공(지기스문트 대공)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멀쩡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사치가 엄청났고, 수십 명의 애인과 총 50명에 달하는 자식을 둘 정도로 문란했죠. 이렇게 살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모자랍니다. 대공은 은을 팔아 번 막대한 돈으로도 부족해 은광을 담보로 잡고 여기저기서 대출까지 받았습니다. 푸거도 대공에게 돈을 빌려줬습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이 거래를 시작으로 푸거는 금융업에 본격 진출합니다.

푸거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는 상대를 구워삶는 화술이었습니다. 푸거는 이 ‘호구 대공’과 금세 절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때로는 아첨하고, 큰 선물을 주고, 망할 게 뻔한 사업이나 전쟁을 부추기면서 돈을 더 많이 빌리게 하고, 은광의 운영권 등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을 받아 갔습니다.

합스부르크 등에 올라탄 푸거, 날아오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전에 나온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전에 나온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화.
148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한 박람회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벌어집니다. 16년 전 황제와 함께 집에 찾아왔던 동갑내기 황태자, 막시밀리안 1세와 푸거가 다시 만난 겁니다. 떠오르는 경제계 신성과 젊은 황태자의 만남. 둘은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합니다. 평생에 걸친 둘의 협력관계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호구 대공 대신 젊고 똑똑한 막시밀리안으로 갈아타야겠다. 그리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거야.’ 푸거는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제안합니다. “우리 일 하나 같이 하시죠.” 작전은 이렇습니다. 먼저 막시밀리안이 대공에게 돈을 빌려줍니다. 신용점수가 빵점이라 푸거 말고는 돈 빌릴 곳이 없는 대공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입니다.

영지를 담보로 잡았다는 점이 좀 찝찝했습니다만, 같은 집안사람인데다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푸거에게 빌려서 ‘돌려막기’하면 되니 대공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푸거가 돌변합니다. “돈 없는데요.” 대공의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대공의 영지는 이렇게 허무하게 막시밀리안에게 넘어갑니다.

이때부터 푸거와 막시밀리안은 한 팀으로 움직입니다. 1490년 막시밀리안은 푸거에게 거액을 빌리고 용병을 마구 사들여 대규모 군대를 꾸린 뒤 헝가리가 지배하고 있던 빈을 되찾아옵니다. 그리고 푸거가 시킨 대로 헝가리와 조약을 맺습니다. “헝가리는 독일 상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한다.” 예상하셨겠지만, 헝가리에 제일 먼저 진출한 상인은 푸거였습니다.

푸거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헝가리에서는 사업가 개인이 광산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광산을 사서 구리를 캐내자. 그리고 대포와 총을 만드는 공장을 함께 만들어서 원료 조달부터 생산까지 한 번에 해결하자.” 이를 위해 푸거는 구리 광산을 사고, 지분까지 넘겨줘 가며 유럽 최고의 기술자를 불러 광산을 정비하고, 용광로와 대포 공장을 짓고, 이를 연결하는 도로를 깔고, 외부의 침입을 막고 거주도 가능한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16세기 출판된 푸거 가문 연대기의 표지로 쓰인 초상화. 야코프 푸거의 위에는 가문 문장이, 아래에는 아우크스부르크의 풍경이 있다. /푸거라이 박물관
16세기 출판된 푸거 가문 연대기의 표지로 쓰인 초상화. 야코프 푸거의 위에는 가문 문장이, 아래에는 아우크스부르크의 풍경이 있다. /푸거라이 박물관
다른 독일 상인들은 “푸거가 미쳤다”고 수군댔습니다. 일단 들어가는 돈부터 천문학적입니다. 게다가 광산은 리스크가 아주 높은 사업입니다. 사고가 나서 광산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푸거는 알거지가 되죠. 게다가 해당 지역은 이슬람 세력 코앞에 있는 곳이라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거는 막대한 돈을 들여 투자를 단행합니다. “우리 푸거 가문의 미래 먹거리는 구리 광산이야”라면서요. 결과적으로 이 사업은 푸거의 평생을 통틀어 가장 수익률이 높은 사업이 됐습니다. 선견지명이 대단하죠.

욕심·의심·변심…푸거의 성공 비결

푸거는 헝가리 북쪽 유럽에서 구리를 사실상 독점하며 막대한 이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여전히 다른 사업자들과 경쟁해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라이벌이 고셈브로트 형제입니다. 이 형제는 강력한 경쟁자인 푸거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푸거보다 더 싫어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경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형제와 다른 사업자들은 푸거에게 “담합해서 가격을 올리자. 같이 잘 먹고 살자”고 은밀하게 제안합니다. 과점시장에서 흔히 있는 일이죠.

그런데 푸거의 욕심은 급이 달랐습니다. “마지막 한 푼까지 내가 혼자 다 먹어야지, 무슨 소리야?” 그리고 베네치아 시장에 구리를 무제한 투입하는 ‘치킨 게임’을 기습적으로 시작합니다. 구리 공급이 갑자기 몇배로 뛰자 가격은 폭락합니다. 고셈브로트 형제를 비롯한 라이벌들도 최대한 버텨봤지만, 현금이 마르자 별 수 없이 항복합니다. 그리고 푸거는 광산업에서 완벽한 1인자가 됩니다. 삼성전자가 과거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두 차례 승리했던 역사를 연상시키는 일화입니다.
1984년 삼성전자 기흥공장 제1라인(64K D램 전용) 준공식. /삼성전자
1984년 삼성전자 기흥공장 제1라인(64K D램 전용) 준공식. /삼성전자
푸거의 배짱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돈줄을 쥐고 흔드는 푸거가 탐탁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다른 데서도 돈을 빌리려 했죠. 푸거는 일반 빚쟁이 대하듯 황제를 상대하는 식으로 대응했습니다. 돈 빌려달라고 하니 “돈을 빌려줘 봐야 말썽에, 수고에…공치사 말고는 얻은 것이 없습니다”는 편지를 보내고, “나 있는 곳으로 좀 와봐” 해도 무시하고, 세금 올린다고 하니 “언제든 내가 변심할 수 있다. 현명하게 처신하시라”며 협박도 했죠. 결국 막시밀리안도 항복합니다. 푸거만큼 많은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이런 배짱 장사는 푸거가 유럽 전역의 정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푸거는 유럽 곳곳에 통신원을 파견해서 시장 정보와 정치 소식, 풍문과 소비자 동향 등을 파악했습니다. 직접 파악한 정보가 아니면 모두 의심했죠.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한판 승부를 벌이려던 막시밀리안에게 “영국이 뇌물을 받고 배신했으니 그만하시라”는 정보를 전해준 것도 푸거였습니다.

또 푸거는 ‘로비의 신’이었습니다. 독일에서 걷은 헌금을 교황청으로 운반하는 사업을 독점한 것도 로비 덕분이었습니다. 교황 선거 운동에 선거자금을 대고 추기경들에게도 뇌물을 뿌린 거죠. 푸거는 헌금을 갖다주고 그 3%를 수수료로 받았습니다. 교황청 입장에서도 별로 불만은 없었습니다. 푸거의 방대한 지점망과 노하우 덕분에 노상강도 걱정 없이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헌금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종교적인 이유로 돈놀이를 금기시하던 유럽에서 사실상의 은행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로비 덕분입니다. 푸거는 1년에 5%의 이자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예금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다른 데 빌려주는 등 굴려서 연 20% 가까운 수익을 올렸죠. 교회가 반발하자 그는 종교학자와 고위 성직자 등을 매수해 “성경에서 꼭 은행업을 금지하는 건 아니다”는 해석을 받아냅니다.
푸거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사업의 중요한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처리했다. 다만 그에게 사업의 기술을 배워간 사람들은 있었다. 이 그림 '사무실에 있는 푸거'(1518)에서 푸거는 제자 마테우스 슈바르츠에게 회계를 가르치고 있다./개인소장
푸거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사업의 중요한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처리했다. 다만 그에게 사업의 기술을 배워간 사람들은 있었다. 이 그림 '사무실에 있는 푸거'(1518)에서 푸거는 제자 마테우스 슈바르츠에게 회계를 가르치고 있다./개인소장
그는 로비로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겼습니다. 1509년 ‘뱅크런’ 위기가 대표적입니다. 푸거에게 막대한 금액을 맡긴 추기경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예금을 당장 상속자에게 인출해 줘야 하게 됐는데, 막시밀리안이 현금을 다 빌려 가서 수중에 돈이 없는 게 문제였습니다. 지금 돈을 못 주면 예금자들이 불안해지고, 너도나도 맡긴 돈을 찾아가려고 하겠고, 그러면 푸거는 알거지가 되겠죠. 푸거는 먼저 추기경의 유언장이 여러장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대응할 시간을 법니다. 그리고 교황에게 뇌물을 찔러 줘서 사태를 수습했죠.

푸거는 미다스의 손이었습니다.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했습니다. 후추를 수입하는 신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과 손을 잡아서 후추 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고요. 이는 베네치아가 몰락하고 포르투갈이 100년 넘게 향신료 사업을 지배하는 계기가 됩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514년 막시밀리안의 빚을 탕감해주는 대신 백작 작위와 50개 마을에서 세금 걷을 권리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장사 하나로 평민이 ‘고귀한 피’가 된 거죠. 푸거의 나이 55세. 세계 최고 부자 자리에 오른 그의 영광도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이번 기사는 그레그 스타인메츠의 <역사상 가장 부자>(한국 번역출간명 <자본가의 탄생>, 노승영 옮김, 부키)와 그의 다른 외신 분석기사들을 참고했습니다.
이번 기사는 그레그 스타인메츠의 <역사상 가장 부자>(한국 번역출간명 <자본가의 탄생>, 노승영 옮김, 부키)와 그의 다른 외신 분석기사들을 참고했습니다.
푸거의 남은 이야기는 다음 주 토요일에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2년 한 해 동안 보내주신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