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입은 맥베스, 이토록 감각적인 비극이라니
“한 번의 살인으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다면, 빠를수록 좋겠지.”

스코틀랜드의 한 재즈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남자가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이렇게 읊조린다. 그를 둘러싼 배우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곧이어 파멸로 이어지는 비극의 서사가 시작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가 25년차 최정상 뮤지컬 배우 류정한을 만나 감각적인 현대 비극으로 재탄생했다. 최근 서울 국립정동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맥베스 레퀴엠’을 통해서다. 이 극장은 매년 한 명의 배우를 선정해 그의 철학과 인생을 담은 제품을 제작하는 기획 공연 ‘연극시리즈’를 해 왔다. 올해는 1997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데뷔해 22년 만에 연극 무대에 도전하는 류정한을 택했다.
 맥베스 레퀴엠의 배우 류정한(오른쪽, 맥베스 분)과 안유진(올리비아 분).   국립정동극장 제공
맥베스 레퀴엠의 배우 류정한(오른쪽, 맥베스 분)과 안유진(올리비아 분). 국립정동극장 제공
맥베스 레퀴엠은 원작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른다. 다만 맥베스가 처음 마녀들에게 예언을 듣고 비극이 시작되는 장소를 재즈바로 설정하고, 의상도 현대적으로 제작해 시대를 특정하지 않았다. 맥베스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에게도 원작과 달리 ‘올리비아’라는 이름을 붙여 원작보다 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었다.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일반적인 연극보다 음악과 몸동작의 비중이 높다. 연극도 아니고 뮤지컬도 아닌 새로운 장르 같다. 맥베스가 던컨 왕을 살해하는 과정이나 맥베스가 느끼는 내적인 갈등 등이 배우들의 동작으로 표현된다. 맥베스를 둘러싸고 어지럽게 움직이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마치 맥베스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극 중 마녀들이 부르는 음산하고 스산한 분위기의 노래는 객석의 공기까지 서늘하게 만든다.

수준 높은 무대 디자인은 마치 하나의 설치 미술 작품을 보는 것 같다. 무대 위를 빼곡하게 채운 수직선은 신분 상승을 꿈꾸는 맥베스의 욕망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를 가두는 창살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디자인이 크게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아 배우들의 연기를 더 돋보이도록 만든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배우 류정한의 연기 내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극의 흐름에 맞는 강약 조절 연기가 명품이다. 재즈 음악과 어우러져 농염한 비극이 완성됐다. 류정한은 “맥베스는 지금의 시대와 사랑, 삶과도 맞닿아 있다”며 “50대의 한 인간으로서 누구나 맥베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도전적 무대다”고 했다. 연말에 어울리는 공연이다. 오는 31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