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에 전시된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에 전시된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물총새 깃털처럼 은은하고 맑은 비취색. 고려인들은 청자의 색을 ‘비색(翡色)’이라고 일컬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청자의 색을 ‘황제만 쓸 수 있는 비밀스러운 색깔’이라는 뜻의 ‘비색(秘色)’으로 불렀다. 고려인들이 ‘숨길 비(秘)’ 대신 ‘물총새 비(翡)’를 쓴 건 청자의 원조인 중국보다 오묘하고 청명한 색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했다. 실제 그런 평가를 받았다.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기술은 송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본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청자의 비색만큼은 극찬했다.

이런 고려 비색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전시가 찾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이 3층 상설 도자공예실을 개편하면서 새로 단장한 청자실을 공개한 것. 청자실이 새 집을 얻은 건 9년 만이다. 작년 2월 개관한 분청사기·백자실과 연결해 한국 도자 역사를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도록 꾸몄다.

비 갠 뒤 하늘 아래에서 보는 청자

보물 청자 퇴화 풀꽃무늬 주자.
보물 청자 퇴화 풀꽃무늬 주자.
새로운 청자실에는 국보 12점, 보물 12점을 포함해 총 250여 점의 고려청자가 전시됐다. 하이라이트는 전체 전시장 면적(136㎡)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몰입형 전시장 ‘고려비색’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청자실에서도 특별히 더 어두운 곳이다. 프랑스 미디어 아티스트 다니엘 카펠리앙이 작곡한 음악 ‘블루 셀라돈’이 잔잔하게 흐르고, 그 속에서 자연광에 가까운 조명이 국보 5점, 보물 3점을 비롯한 ‘상형청자’(식물·동물의 모습을 본떠 만든 청자) 18점을 비추고 있다.

관람객들이 온전히 상형청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을 어둡게 하고, 자연광에 가까운 조명을 달았다. 전시를 기획한 강경남 학예연구사는 “고려청자의 비색은 비구름이 갠 뒤 햇빛 아래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며 “이런 빛을 구현하기 위해 유물마다 조도, 조명 각도 등을 하나하나 다르게 연출했다”고 말했다. 청자를 떠받치고 있는 받침대도 비색을 방해하지 않도록 흙 색깔로 구현했다.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제작된 국보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는 고려비색의 백미다. 여러 겹의 꽃잎으로 이뤄진 연꽃 위엔 칠보무늬가 섬세하게 투각된 구(球) 모양의 뚜껑이 있다. 그 밑에는 앙증맞은 크기의 토끼 네 마리가 향로를 등에 이고 있어 화려함의 절정을 이룬다. 향로 옆에는 국보 ‘청자 어룡모양 주자’가 있다. 물을 따르는 부분은 용 머리로, 몸통 부분은 물고기의 비늘로 장식돼 있다. 비늘 안쪽엔 유약이 몰려 있어 입체감을 더한다. 옛 고려인들이 얼마나 역동적인 조형미와 아름다운 비색을 잘 구현했는지 알 수 있는 유물들이다.

섬세함과 화려함의 절정

고려비색 전시장에서 나오면 깨져 있거나 구부러진 모양의 청자들을 만날 수 있다. 왕실용 고급 자기를 만들었던 전북 부안의 유천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상감청자들이다. 완형이 아니라 자기를 전시해놓은 건 파초잎에서 쉬는 두꺼비, 왜가리가 노니는 물가 풍경 등 그동안 잘 볼 수 없었던 무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강 연구사는 “고려인의 자연관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로 문화사적 의의가 높다”고 했다.

청자로 만든 꽃병과 베개 등은 고려의 높은 문화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모양 병’은 고려 왕실에서 꽃병으로 쓰인 청자다. 물결 모양으로 장식된 입구와 볼록한 참외 모양의 몸통은 고려청자의 품격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중간이 오목하게 들어간 ‘청자 상감 구름·학무늬 베개’는 사면이 꽃, 학, 구름으로 섬세하게 장식돼 있다. 베개 양 끝에는 고려인들이 ‘꿈을 꾸기 위해 들어가는 통로’로 여겼던 구멍이 뚫려 있다.

고려청자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10세기 말~13세기 중반 꽃 피웠던 고려청자는 14세기 들어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고려가 힘을 잃으면서 국가가 주도하던 청자 생산 체계가 무너지고, 저질 청자들이 쏟아진 탓이다. 청자실 말미에는 고려 말기에 생산된 다양한 청자 항아리, 잔, 대접 등이 전시돼 있다. 이는 분청사기·백자실의 입구에 있는 조선 초 상감분청사기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전시는 연중 무료 관람.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