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로 불리는 문경새재를 넘어 남쪽으로 차를 타고 30분쯤 더 들어가면 정갈한 한옥 기와집이 보인다. 이 뜬금없는 곳에 자리한 웅장한 기와집 현판엔 ‘화수헌(花樹軒)’이라고 적혀 있다. 꽃과 나무가 만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화수헌이 있는 산양면 현리는 인구 7만 명의 소도시인 경북 문경 안에서도 30가구 남짓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을 찾는 외지인은 거의 없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18년. 이곳에 방치된 230년 된 폐가가 한옥 카페 화수헌으로 탈바꿈한 이후다. 화수헌은 SNS를 타고 20·30대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이 지역을 찾는 관광객은 이제 연 10만 명에 달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사라져가던 마을의 작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시골에 눌러앉은 청년들

 그래픽=김선우 기자
그래픽=김선우 기자
화수헌을 만든 건 임직원 평균나이 27세의 공간재생 스타트업 리플레이스다. ‘다시, 이곳(Re:Place)’이란 의미를 담아 지역을 되살리겠다는 취지로 시작했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문경시의 지방소멸위험지수는 0.24로 전국 시 가운데 경북 상주시(0.20), 전북 김제시(0.22) 다음이다. 소멸위험지수가 0.5보다 낮으면 30년 뒤 지역이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다. 이런 문경시도 1960~1980년대까지는 한때 인구가 16만여 명에 육박할 정도로 번성한 곳이었다. 하지만 탄광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쇠퇴했다.

최근 한경 긱스(Geeks)와 만난 도원우 리플레이스 대표는 “소멸 위기 지역 대부분이 지금보다 인구가 3~4배는 많은 전성기가 있었다”며 “그때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2300㎡ 규모의 화수헌 곳곳엔 문경의 정취가 담겨 있다. 오미자에이드, 문경 8곡 미숫가루 등 ‘문경스러운’ 메뉴가 대표적이다. 리플레이스팀의 최우선 가치인 ‘상생’이 반영된 결과다. 이들은 사업 자체에만 집중하기보다 마을과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지역 농장에서 가져온 재료로 메뉴를 짜는 건 기본. 산양면 오미자 농가에서 직접 따온 오미자로 만든 에이드와 현미·땅콩·보리·율무 등 문경 8곡을 빻아 만든 미숫가루 등을 내놨다. 인근 중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입학식에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화수헌의 넓은 마당에선 문경 주민들의 결혼식도 열린다. 핫플레이스를 넘어 지역 상생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자체 ‘지역상생지표’도 만들었다. 인구 유입, 지역소비 지출, 일자리 창출, 관광객 유입, 문화행사 기획 횟수 등이다. 지난해 지역소비 지출은 7000만원을 기록했다. 리플레이스가 농가나 가공업체 등과 거래한 금액이다. 화수헌 인근에 양조장을 개조한 베이커리 카페 ‘산양정행소’, 적산가옥을 개조한 스튜디오 ‘볕 드는 산’ 등 추가 지점도 개설했다.

농가 돕고 춤사위 벌이기도

도 대표는 대구의 작은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던 중 창업을 결심했다. 일본 총무성 장관을 지낸 마스다 히로야의 책 <지방소멸>을 읽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지역에 관심이 갔다. 경상북도에서 진행한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사업을 활용했다. 청년들이 창업을 통해 지역에 정착하면 꺼져가는 지역 불씨를 살릴 수 있다는 취지의 사업이다. 선발되면 인당 3000만원씩 최대 2년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도 대표는 친한 대학 후배들을 설득해 다섯 명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초기에는 문경 시민에게 화수헌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시청 복도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기도 하고, 관광객이 많이 찾는 문경새재에 가서 춤사위를 펼치기도 했다. 마을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거나 일손이 부족한 농가의 일을 돕는 건 기본이었다. SNS 마케팅 활동도 열심히 했다. 화수헌을 ‘인스타 명소’로 키워갔다.

이들은 올초 경북 영양에 한옥 카페 ‘연당림’을 선보였고, 내년 3월 광주에 매장을 열 계획이다. ‘지속해서 유지되는 지역 콘텐츠 플랫폼’이 이들의 목표다. 화수헌 같은 지역 거점을 전국 여러 곳에 마련해 로컬 크리에이터(지역 특색을 강조한 창업가)들이 활동하면 죽어가는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지속가능한 지역 콘텐츠를 생성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공간 재생 스타트업이 뜬다

리플레이스처럼 디지털 기술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공간 재생에 나서는 청년 스타트업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부산, 강릉, 제주 등 다양한 지역에서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 강원 양양의 스타트업 서피비치는 국내 최초로 ‘서핑 전용 해변’을 선보였다. 양양을 ‘서퍼의 성지’로 만들어 서핑 대중화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2015년 당시 낙후한 해변이던 양양에서 컨테이너 건물 두 개로 시작해 현재 3300㎡가 넘는 서핑스쿨과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70만~80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로 성장했다.

제주 기반 스타트업인 다자요는 오래된 빈집을 숙박 업소로 재탄생시켰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뒤 리모델링을 진행한다. 리모델링이 끝난 집은 다자요가 10년간 임차해 숙박 시설로 운영한다. 최근엔 이를 활용해 제주 기반 스타트업을 위한 사무 공간을 제공하는 사업도 시작했다.

공간기획 스타트업인 글로우서울 역시 낡은 마을을 ‘힙’한 곳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2015년부터 서울 익선동에 카페와 식당 등을 입점시키며 새로운 상권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후했던 대전 소제동 역시 이 스타트업의 손을 거친 뒤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최근엔 달동네 꼬리표가 붙은 창신동 일대 6만6337㎡ 구역을 다목적 상업 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제 막 지역 생태계가 조성되는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지역 기반 창업이 지속가능하도록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유망한 창업가가 몰려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자체가 지역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줄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기대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지방 창업에 관심이 있지만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밑바닥’부터 지자체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며 “디지털 전환(DX)이 로컬 크리에이터들에게 화두가 되고 있는 만큼 DX에 대한 접근성이 높은 청년 세대가 지역을 살리는 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경=김종우/최다은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