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고, 춤추며, 연극을 하는 시민교육 기획자 주은경이 엮은 책이다. 스스로를 교육하고 다채로운 놀이와 배움을 기획해온 사람들의 여정을 담았다. 그는 “고립되지 않고 같이 놀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누구에게든 필요하다”고 말한다. (궁리출판, 320쪽, 1만8000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간송 전형필의 북단장,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서울 성북동은 한때 작가들이 모여 사는 ‘문인촌(村)’이었다. 1930년대 서울 인구가 폭증하자 한양도성 외곽을 택지로 개발하던 때다. 문인들은 북악산 가까이 고즈넉한 이 동네에 집필실 겸 가정집을 꾸렸다. 서울 사대문 안 중심지에 비하면 성북동은 집값이 쌌다. 서울 변두리치고는 전차 정거장이 가까워 교통편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날 파주 신도시에 문인과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사정과 비슷하다. 이런 풍경은 성북동이 부촌의 대명사가 된 것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드라마 속 부잣집 사모님들이 전화를 걸면서 “여기 성북동인데요”라고 하는 대사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최근 출간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12권(서울편 3·4)에는 미처 모르고 지나친 서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저자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사진)은 서촌, 인사동 등을 거닐며 책을 썼다. 11권은 서울 사대문 안의 오래된 동네와 북한산의 문화유산을, 12권은 봉은사, 가양동 등 한강 이남 지역을 다뤘다.이번에 내놓은 두 권의 책은 거창한 문화유산보다는 주로 사람들의 정취가 묻은 골목길 이야기다. 2017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10권이 창덕궁을 비롯한 5대 궁궐, 성균관, 동관왕묘를 다룬 것과 대조적이다. 유 이사장은 현재진행형의 서울 역사를 글로 남기며 ‘100년 후 사람들에겐 내 책이 기록이자 증언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서울 종로구 창성동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 저자는 적산가옥(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지은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에 살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이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유 이사장은 지난 25일 서울 서교동 창비서교빌딩에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어 “궁 밖의 지역은 현재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어떻게 써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 굉장히 어려웠다”며 “사실 궁궐 중심으로 쓴 9·10권으로 서울 답사기를 마칠까 생각했었다”고 했다.저자의 엄살과 달리 글은 유년 시절 경험이 섞여 더욱 생생하다. 11권의 부제는 아예 ‘내 고향 서울 이야기’다. 유 이사장은 옛 창신동 골목을 설명하며 박수근 화백의 그림 ‘아기 업은 소녀’를 불러낸다. 그 시절 골목에는 딱지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공기놀이, 땅따먹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유 이사장의 누나는 그림 속 소녀처럼 막냇동생을 업고 돌봤는데, 어찌나 고무줄놀이를 하고 싶던지 동생이 잠이 들면 집에다 뉘어놓고 나와 줄을 넘었다고 한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글들을 읽다 보면 정겨운 풍경이 떠올라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11권에는 청와대의 문화유산 이야기도 나온다. 문화유산 전문가인 그조차 ‘미스터리’라는 건물이 있다. 청와대 관저 옆 침류각이라는 건물이다. 청와대 안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오래된 한옥이다. 기품 있는 누마루 형식과 드므(궁궐 곳곳에 뒀던, 화재 대응용 물을 담아두던 넓은 독) 등을 보면 왕가의 건축물로 추정되는데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서울편은 12권(서울편 4편)으로 끝을 맺었지만 앞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3권가량 더 출간될 예정이다. 1993년 닻을 올린 이 시리즈는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다. 유 이사장은 “다음 시리즈는 ‘국토 박물관 순례’를 콘셉트로,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시작으로 그간 쓰지 않은 곳들을 거쳐 독도에서 마지막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고 했다. 이미 다음 책 집필에 들어갔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재미 중 하나는 저자가 발로 뛰어 찾은 해당 지역의 맛집들을 소개한다는 점이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이 없던 시절에는 이 책이 국내 여행 맛집 지도였다. 이번에 소개된 인사동의 사찰음식점 ‘산촌’, 막걸리집 ‘싸립문을 밀고 들어서니’ 등은 주말 나들이 전에 모바일 지도 앱에 저장해 둘 법하다.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미술품 감정의 세계를 안내하는 책들이 나왔다. 명작에 대한 해설이나 감상을 전하는 전통적 미술책들과 결이 달라 눈길을 끈다.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소개하는 책도 출간됐다.<미술품 감정과 위작>(송향선 지음, 아트북스)은 미술품 감정에 대해 말한다. 저자는 1982년부터 40년 동안 감정사로 일했다. 한국 근현대미술품 감정의 산증인이다. 그는 책에서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의 작품을 중심으로 실제 감정을 진행하듯 진작(眞作)인지, 위작(僞作)인지 따져나간다. 세 작가의 작품을 고른 이유는 고가인 만큼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위작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책은 일반인이 접하기 힘든 위작을 도판으로 직접 보여준다. 원작과 대조하며 왜 위작인지 자세히 짚어준다. 전문적이지만 어렵지는 않다. 여러 도판을 보여주는 데다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준 덕분이다. 미술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세 작가의 작품에 새로운 눈이 뜨이게도 해준다. 감정은 작가와 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위작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진작의 아름다움도 재발견하게 된다.<감정과 감상 차이>(임명석 지음, 아트프라이스)는 고미술 감정을 다룬다. 40년 가까이 고미술품 감정을 해왔던 저자가 고려와 조선 시대 작품을 중심으로 서화 감정의 기초, 이론, 역사를 살펴본다. 이 책의 특징은 ‘문방사우’인 종이, 붓, 먹, 벼루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설명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붓은 서화가의 손을 대신하고, 창작자의 마음을 전하는 수단”이라며 “붓끝으로 피어나는 필법은 곧 인격의 표출로 인식돼 인격 수행과 연마의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한국 땅에서 예술하기>(박소양 지음, 한길사)는 ‘임옥상 보는 법’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한국 1세대 민중미술가인 임옥상을 다룬다. 임옥상은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에 섰고, 그림·조각·설치 등 장르를 넘나들며 꾸준하게 사회 참여 목소리를 내왔다.책은 그의 그림에 꾸준히 등장하는 ‘땅’에 주목한다. “그에게 땅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두 발을 딛고 살아내는 삶의 터전이자 상호 관계성의 근간”이라는 설명이다. 상처 난 땅, 파헤쳐진 땅, 빨간 웅덩이가 고인 땅 등의 이미지는 어느덧 일방적인 착취에 가까워진 땅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한다.책은 또 민중미술을 반개발주의, 향토주의, 낭만주의 등으로 치부하는 편협한 시각에 반기를 든다. 저자는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미술사와 비평 등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 교수다. 한국 민중미술에 대한 서구의 왜곡된 담론을 바로잡기 위해 책을 냈다고 했다. 책은 영어로도 출간될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선 임옥상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시인과 경영인은 닮았다. 둘 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다. 시가 ‘가장 짧은 문장으로 가장 긴 울림을 주는 것’이라면, 경영은 ‘가장 희박한 가능성에서 가장 풍성한 결실을 이루는 것’이다.<리더의 시, 리더의 격>은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이기도 한 고두현 시인과 수십 년 동안 여러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한 황태인 토브넷 회장이 함께 쓴 책이다. 격려, 역경, 치유, 교감, 성찰, 해학 등 29가지 키워드를 시인 겸 저널리스트와 현직 경영자인 두 저자가 각기 다른 시각으로 풀어낸 인문 경영 에세이다.저자들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책 속의 시 한 구절, 지인과의 담소, 우연히 목격하거나 경험한 일 등 일상 곳곳에서 화두를 발견했다. 일을 대하는 건강한 태도와 주변과 이웃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등을 전하기 위해 고민하며 써온 글들을 모았다.하나의 키워드를 놓고 비슷하지만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두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시와 경영이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매주 한 편씩 이메일 뉴스레터를 통해 국내 여러 기업의 CEO를 비롯해 오피니언 리더 등 수만 명의 회원에게 공유돼 온 고두현 시인의 글에, 자신의 경영 노하우를 담아 정성껏 답해온 황태인 회장의 글이 더해졌다.예컨대 함민복의 시 ‘우표’를 읽고 고두현 시인이 그 속에 나오는 우편배달부의 따뜻한 마음에 감복해 편지를 쓴다. 이를 읽은 황태인 회장이 본인에게 따뜻한 격려로 용기를 북돋워준 인생의 귀인 이야기를 찬찬히 털어놓는 식이다. 시인의 영감과 경영자의 지혜가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통찰의 문이 열린다.이 시대 리더들 혹은 앞으로 리더가 될 사람들이 인문학적 사색과 함께 위로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점차 나이를 먹고 직급이 높아지는 리더의 자리로 올라갈수록 종종 고독하고 외로운 순간들이 찾아온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고뇌하는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경영자와 비즈니스맨들에게 인생을 되돌아보고 생각을 정화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하는 책이다. 외로운 내 마음 한 조각을 알아봐주는 작은 글귀들이 모여 있다.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