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세계에도 드라마가 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깊은 울림을 주는 서사가 펼쳐진다. 동물 다큐멘터리가 꾸준히 인기를 끄는 이유다.식물은 어떨까. 신간 <극한 식물의 세계>는 ‘식물의 세상에도 드라마는 있다’고 말한다. 김진옥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식물 분야 전문위원과 소지현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원이 쓴 책이다. 책에 따르면 식물들의 생존경쟁도 만만치 않다. 정적이고 평화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저마다 기발한 전략을 내세워 생존을 위한 암투를 벌인다.우리가 아는 지상의 식물 모습은 4억6600만 년 전 나타났다. 물속에서 광합성을 하던 녹조류가 물 밖에 노출되면서다. 대부분 금방 죽어버렸지만, 물 밖에서도 살 수 있는 돌연변이가 생겨났다.바로 이끼다. 경쟁자가 없는 육지는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수가 불어나자 경쟁 압력이 높아졌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끼보다 더 높이 자랄 수 있는 고사리식물, 물기가 없는 곳에서도 자랄 수 있는 겉씨식물, 꽃을 피우는 속씨식물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책은 더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인 자이언트 라플레시아가 사는 곳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잎도, 줄기도, 심지어 뿌리도 없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땅바닥에서 거대한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게 전부다. 사실 자이언트 라플레시아는 꽃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포도나무 속에 몰래 숨어 지낸다. 기생 식물이다. 잎을 낼 에너지도, 뿌리를 뻗을 에너지도 모두 아껴뒀다가 오로지 꽃을 피우는 데만 쏟는다. 나름의 생존 전략이다.인도네시아 밀림엔 갖가지 식물이 넘쳐난다. 경쟁자들이다.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자이언트 라플레시아가 선택한 방법은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 레드우드도 마찬가지다. 미국 레드우드 국립공원에 있는 한 나무는 116m가 넘는다. 아파트 39층과 맞먹는 높이다. 당연히 햇빛을 받는 데 유리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높은 곳까지 올려보내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레드우드가 선택한 전략은 ‘비와 안개 속에 있는 수분 흡수하기’다. 이 나무는 뿌리뿐만 아니라 나무껍질과 잎을 통해서도 물을 흡수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식물들의 놀라운 생존 전략은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나무가 대표적인 사례다. 대나무의 어린싹인 죽순은 땅 위로 갑자기 솟아난 뒤 거침없이 자란다. 잎도 나오지 않은 상태인데 어떻게 가능한 걸까. 비밀은 엄마 대나무와 연결된 뿌리줄기에 있다. 엄마 대나무에서 공급받은 영양분 덕분에 광합성을 하지 않고도 쑥쑥 클 수 있다. 38일째가 되면 키가 약 13m에 이르고 4개월째가 되면 스스로 만든 양분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도 새 뿌리줄기를 뻗어 또 다른 죽순을 키워낸다. 대나무 한 개체는 땅속으로 서로 연결된 거대한 대나무의 가지 하나라고 볼 수 있다.사람들이 많이 키우는 난초도 기발한 전략을 쓰는 식물이다. 씨앗이 1㎜가 안 될 정도로 작다. 먼지처럼 날아다니며 멀리 퍼져나갈 수 있다. 문제라면 너무 ‘경량화’에 치중하다 보니 싹을 틔울 때 필요한 영양분인 배젖이 씨앗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난초는 파트너를 찾았다. 곰팡이 같은 균사다. 난초는 균사에서 영양분을 얻어 싹을 틔우고, 자기 뿌리에 균이 살게 해준다. 이런 공생 관계 덕에 난초는 국화과(3만2000여 종) 다음으로 많은 종(2만8000여 종)을 거느린 식물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식물을 위한 변론>은 미국인 맷 칸데이아스가 쓴 책이다. 그는 생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식물을 위한 변론’이란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자는 “자연 다큐멘터리가 먼 오지의 동물만 다루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나는 수없이 많은 놀라운 생태계의 상호작용이 우리 집 뒤뜰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말한다. 다루는 주제는 <극한 식물의 세계>와 비슷하다. 자이언트 라플레시아, 변경주선인장, 자바오이, 파리지옥 등 두 책에서 중복 출연하는 식물도 많다. <극한 식물의 세계>가 식물 다큐멘터리처럼 읽힌다면, <식물을 위한 변론>은 과학 에세이처럼 읽힌다.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문단의 문학을 철저히 파괴해 만인의 문학이 될 수 있게 하겠다.”1972년 10월, 30대의 ‘젊은 문학평론가’ 이어령 선생(사진)은 문예지 <문학사상> 창간호에 이 같은 문장을 적었다. 기성 작가들의 글을 단순 소개하지 않고, 신인을 적극 발굴하며 새로운 문학의 장을 열겠다는 선언이었다. ‘모두의 문학’을 표방한 <문학사상>은 창간호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표지는 구본웅 화백이 그린 ‘천재시인’ 이상의 초상화. 발행 1주일 만에 초판 2만 부가 소진돼 부랴부랴 재판을 찍었다.이렇게 시작된 <문학사상>이 600호를 맞았다. 1972년 10월 첫 호를 낸 지 50년 만이다. 국내에서 월간 문예지가 600호를 발행한 건 <현대문학>에 이어 두 번째다.50년간 <문학사상>은 창간 일성대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데 공을 들였다. 소설가 강석경, 성석제, 윤대녕과 시인 정끝별 등이 이 잡지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1970~1980년대 <문학사상>은 문단의 ‘특종’ 매체로도 이름이 났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소실된 문학 관련 자료를 대거 발굴하면서다. <문학사상>은 자체 자료조사연구실을 두고 윤동주, 이상, 김소월의 미발굴·미발표 작품을 찾아 소개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작가나 문학 연구자를 ‘특파원’으로 임명해 해외 문단 소식을 전하도록 한 것도 당시에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영문학자 고(故) 최월희 뉴욕대 명예교수, 불문학자 고(故) 유평근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한때 <문학사상> 특파원을 지냈다.화가들이 문인의 얼굴을 그린 특유의 표지도 유명하다. 이제는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요즘은 매달 문인 한 사람의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한다.마침내 <문학사상>은 반세기의 금자탑을 쌓았지만 앞길은 녹록지 않다. 출판 시장 위축으로 문예지를 찾는 독자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여서다. 2020년에는 <문학사상>을 발행하는 문학사상사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이 저작권 부당 계약 논란에 휩싸였고, 작가들이 <문학사상> 기고를 ‘보이콧’하는 일까지 겪었다.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권영민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번 600호에 실은 글 제목은 ‘새로운 50년을 위한 도전’이다. 권 주간은 “우리 문학을 이끌어 온 순수 문예지가 대부분 경영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며 “우리 문학의 위상은 문학에 대한 사회문화적 지원과 관심과 참여로 더욱 높아지고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문학사상>은 600호 첫 페이지에 창간호의 창간사를 다시 실으며 발행 취지를 되새겼다. “상처진 자에게는 붕대와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폐를 앓고 있는 자에게는 신선한 초원의 바람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역사와 생을 배반하는 자들에겐 창끝 같은 도전의 언어, 불의 언어가 될 것이다.”<문학사상>은 앞으로 정보기술(IT) 발전에 따른 작가와 독자의 실시간 연결, 한국문학의 세계화 등 문학과 사상에 대한 폭넓은 고찰을 담아내겠다는 계획이다.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우리가 책을 펼칠 때마다 책장 표면과 우리 눈 사이 어디쯤에서 기적과도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잠시나마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멈추고 타인이 되어보는 데 독서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첫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에는 이처럼 ‘읽기’에 대한 찬양이 가득하다. 이 책은 그간 발표한 에세이와 칼럼, 강연록 중에서 토카르추크가 직접 12편의 글을 골라 묶은 것이다.책을 읽다 보면 마치 그의 서재에 초대된 듯하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쾌락 원리의 저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몽테뉴의 <에세> 등 토카르추크의 독서 목록이 줄지어 인용된다.폴란드 최고 권위 문학상인 니케문학상,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빛나는 수상 경력이 그를 수식하지만 토카르추크는 “나는 작가이기 전에 우선 독자”라고 말한다. 독서를 통해 타인이 돼보는 기적은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오직 문학만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존재의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그들의 당위성을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운명을 체감하게 만들 수 있다.”그러나 오늘날 소셜미디어의 글은, 심지어 일부 문학 작품도 “솔리스트들로만 구성된 합창단”처럼 자신의 경험과 역사만을 경쟁적으로 강조한다는 게 토카르추크의 진단이다. 오늘날 기후 위기, 국가 간 분쟁 등의 원인도 이 같은 이기주의와 분열에서 찾는다.토카르추크가 주목한 대안은 다시 문학이다. 그는 ‘다정한 서술자’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다정함이란 대상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감정을 공유하고,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기술이다.”토카르추크는 최근 민음사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우리는 팬데믹 이후 전쟁과 인플레이션, 그리고 기후 재앙이라는 또 다른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며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고, 그래서 인간은 문학을 발명했다”고 말했다.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