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째 가업 승계해 전통 고수, 가장 얇은 '옥춘지' 제지술 보유
해외서도 가치 인정받는 한지…루브르 박물관 복원팀도 큰 관심

[※ 편집자 주 = 자고 나면 첨단제품이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옛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도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않더라도 조상의 혼이 밴 전통문화를 후대에 전수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들이 선보이는 전통문화의 가치와 어려운 여건에도 꿋꿋하게 외길을 걷는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과 예우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충북 장인열전'을 매주 금요일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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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장인열전] 1천년 끄떡없는 종이 만든다…안치용 한지장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보유국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직지심체요절, 동의보감, 난중일기 등 그 수가 무려 16종에 이른다.

이들 기록유산이 오랜 풍파에도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것은 전통 방식으로 만든 종이인 한지(韓紙)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지의 우수한 내구성과 보존성은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비단의 수명은 500년이지만, 한지는 족히 1천년을 견딘다는 뜻이다.

국가무형문화재인 한지장 안치용(63)씨에게 한지는 천년을 잇는 역사이자 미래는 여는 시작점이다.

[충북 장인열전] 1천년 끄떡없는 종이 만든다…안치용 한지장
안씨는 한지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 산지로 유명한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서 반세기 동안 전통 방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외길을 걷고 있다.

29일 기자가 그의 한지박물관을 찾았을 때 그는 박물관 앞마당에서 물질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닥나무 섬유를 넣은 닥풀 물에서 대나무발을 이용해 한지를 떠내는 작업인데, 오롯이 장인의 직감으로 한지의 무게와 두께를 계산해야 하는 예민한 공정이다.

한참을 숨죽이고 지켜본 후에야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충북 장인열전] 1천년 끄떡없는 종이 만든다…안치용 한지장
"앞 물질로 기둥을 세워서 옆 물질로 두께를 맞추고, 다시 앞 물질로 마감을 해서 우물 정(井)자로 엉기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이쪽저쪽에서 당겨도 잘 안 찢어지는 한지가 나오는 겁니다.

"
곧 그의 한지 자랑이 이어진다.

"한지는 그 기술이 독보적입니다.

원료인 닥나무부터 다르죠. 사계절이 뚜렷한 환경에서 자란 우리나라 닥나무는 야무지고 단단해 섬유질이 아주 길고 질깁니다.

반면 중국이나 일본 닥나무는 섬유질이 약해 좋은 재료가 못 되죠."
한지는 물질을 포함해 20가지가 넘는 공정을 거쳐 탄생한다.

이런 한지를 그는 '기다림의 종이'라고 했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 두드리고 삶는 과정과 닥풀 만들기, 물질, 종이를 부드럽게 하는 도침 등 쉬운 과정이 하나도 없다.

[충북 장인열전] 1천년 끄떡없는 종이 만든다…안치용 한지장
거의 모든 과정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기계로 할 수 있는 공정은 기껏해야 모터를 활용한 두드림 뿐이다.

한지가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보름이 소요된다.

고단한 작업이지만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와 한지의 만남은 정해진 운명과도 같다.

그는 어린 시절 강원도 원주와 충북 제천, 괴산을 오가면서 한지를 만들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밑에서 자랐다.

그의 놀이터는 늘 한지공장이었다.

그러다가 23세 되던 해 아버지의 공장을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제지 작업을 시작했다.

고(故) 류행영 한지장(중요무형문화재)의 기술을 사사해 가장 얇은 한지인 '옥춘지'를 만드는 기술까지 연마했다.

[충북 장인열전] 1천년 끄떡없는 종이 만든다…안치용 한지장
그가 만든 한지는 해외에서도 가치를 인정받는다.

특히 훼손된 종이기록물이나 미술품을 수리하고 복원하는데 최적의 재료로 주목받는다.

2010년대 중반까지 세계 미술품 복원시장은 일본의 '화지'가 독점했다.

그러나 2017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복원팀이 막시밀리앙 2세 책상 복원에 처음으로 한지를 사용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후 로스차일드 컬렉션, 9세기 코란, 20세기 초 반출됐던 병풍 복원에도 화지 대신 한지가 사용됐다.

2019년에는 루브르 박물관 복원팀이 직접 한지박물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충북 장인열전] 1천년 끄떡없는 종이 만든다…안치용 한지장
안씨는 "당시 한지 제작 과정을 둘러본 복원팀 관계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고, 한지의 질감과 내구성을 높이 평가했다"며 "앞으로 한지는 루브르 박물관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물 복원 소재로 널리 쓰이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루브르 박물관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지난 4∼7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있는 '아부다비 루브르'에서 안씨 소유 한지 공예품을 가져다가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급격한 산업화에 국내 한지 시장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전통방식을 고수하면서도 현대 쓰임새를 가미한 기능성 한지를 개발하는 등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충북 장인열전] 1천년 끄떡없는 종이 만든다…안치용 한지장
그는 1984년 황토벽지 등 기능성 한지 16종을 시작으로 다양한 한지 개발에 나섰는데, 현재 입체문양·돋을문양·색염색 방법·한지 수의 등 특허만 15개다.

돋을문양 한지는 공예나 포인트 벽지, 책표지, 찻상 등에 활용되고 입체문양은 서랍장, 컵받침, 장 옆이나 앞면 등에 다양하게 쓰인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시국을 반영해 한지 마스크를 선보이기도 했다.

안씨는 "질기면서도 공기가 잘 통하는 한지의 특성이 마스크 소재로 안성맞춤"이라며 "기능성에 아름다움을 가미한 한지가 일상생활에서 이로운 도구임을 계속해서 알려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충북 장인열전] 1천년 끄떡없는 종이 만든다…안치용 한지장
이런 그에게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전통 한지 기술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아서다.

안씨는 "환갑을 넘기면서 후진 양성에 나설 때가 됐지만 한지 만드는 일이 고생한 만큼 돈이 되지 않다 보니 선뜻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전통문화가 자꾸 사라지면 그 나라 역사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며 "한지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잇는 전통문화에 관심을 두고 지키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