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영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강원 양양 설해원 레전드 코스 14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설해원 제공
조수영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강원 양양 설해원 레전드 코스 14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설해원 제공
‘설악산(雪)과 동해(海)가 만든 정원(園).’

강원 양양 설해원의 레전드 코스 14번홀(파5·인코스 5번홀) 티박스에 올라서니, 나도 모르게 “이름값 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저 멀리 골프장을 굽어보고 있는 태백산맥 아래 죽 뻗은 설악산 줄기가 홀을 감싸안은 구조. 눈을 들어올리면 푸르른 산과 나무가 들어오지만, 바로 앞에는 마치 사막과도 같은 모래 무덤만 보이는 홀. ‘자연이 빚은 절경’과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 한데 어우러져 쉽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을 선물하는 홀이다.

대관령을 타고 흐르는 상쾌한 공기와 초가을 같은 날씨 덕분인지, 직전 홀까지 꽤 괜찮은 성적을 냈다. 컨디션이 최상일 때만 나오는 160m짜리 드라이버샷도 몇 차례 날린 터. 그게 화근이었다. “여성 아마추어 골퍼치곤 장타네요. 이번 홀은 시니어 티에서 쳐보시죠. 레이디 티보다 전망이 좋거든요”라는 안제근 설해원 대표의 꾐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평상시였다면 그냥 흘려들었을 텐데….

시니어 티에서 홀까지 거리는 430m로 레이디 티(397m)보다 33m 길게 세팅됐다. 그래도 120m만 날리면 페어웨이에 올릴 수 있는 거리. ‘오늘 컨디션이면 저 멀리 태백산맥까지 닿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티를 꼽았다.

눈은 호강하지만 몸은 고달픈 홀

설악산 대청봉에서 뻗어나온 듯한 레전드코스 전경. 왼쪽부터 18번홀, 1번홀, 9번홀.  /설해원 제공
설악산 대청봉에서 뻗어나온 듯한 레전드코스 전경. 왼쪽부터 18번홀, 1번홀, 9번홀. /설해원 제공
설해원은 2007년 문을 열었다. 당시 이름은 골든비치 리조트였다. 설해원으로 명찰을 바꾼 건 2017년이었다. 시뷰·새먼·파인 등 3개 코스 27개 홀에 웅장한 클럽하우스와 흔치 않은 온천 수영장을 앞세워 휴양 리조트로 이름을 날렸다.

여기에 지난해 9월 18홀짜리 레전드 코스를 더해 45개 홀로 덩치를 불렸다. 2019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의 전설’로 꼽히는 안니카 소렌스탐 및 로레나 오초아와 당시 ‘LPGA 최강자’였던 에리야 쭈타누깐, 박성현을 초청해 연 ‘레전드 매치’를 기념해 이런 이름을 붙였다. 물론 “전설적인 코스가 되겠다”는 뜻도 담았다.

레전드 코스 전반 9홀은 남촌GC, 송추CC 등을 설계한 송호 설계가가, 후반 9홀은 화산CC 리모델링과 제주 CJ클럽나인브릿지 조성을 맡은 안문환 설계가가 맡았다. 안 대표는 “안 설계가가 레전드 코스를 설계할 때 ‘무릉도원 같은 꿈속 세계를 구현해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레전드 코스가 명품인 건 비싸고 관리하기 힘든 벤트그라스를 페어웨이에 깐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양탄자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폭신하고 촘촘한 잔디다.

시그니처홀인 14번홀은 그리 길지 않은 파5홀인데도, 이글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작년 9월 개장 이후 이글 증서를 받아간 아마추어 골퍼는 한 명도 없다. 데이터업체 CNPS에 따르면 지난 6월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셀트리온퀸스 마스터스에서 이 홀의 평균 타수는 4.99타였다. 대다수 프로들은 파5홀이 나오면 이글 또는 버디를 노리지만, 이 홀에선 파 세이브만 해도 평균은 한 셈이다. 이유는 홀 곳곳에 덫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린을 3단으로 구겨놓아 3퍼트가 속출한다. 태백산맥이 만드는 돌발적인 바람도 변수다.

셀트리온퀸스 마스터스 최종라운드 당시 챔피언조에서 우승 경쟁을 하던 송가은(22)도 이 홀에서 발목을 잡혔다. 티샷을 297야드 페어웨이로 보낸 뒤 우드로 투온을 노렸지만 그린 옆 벙커에 빠뜨렸다. 결국 네 번 만에 그린에 올린 뒤 보기로 홀아웃했다. 송가은은 그렇게 우승 경쟁에서 밀려났다. 반면 ‘지키는 골프’ 전략을 세운 박민지(24)는 이 홀에서 3온 2퍼트로 파 세이브한 데 힘입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30m의 압박감은 생각보다 컸다. ‘멀리 쳐야 한다’는 부담감 탓인지 빗맞은 티샷은 100m 정도 날더니 페어웨이에 못 미쳐 떨어졌다. 설해원에선 이곳을 ‘조경구역’이라 부르지만, 실제론 ‘황무지’(웨이스트 벙커)란 단어가 어울렸다. “그 정도 힘이면 조경구역을 충분히 넘길 수 있다”는 안 대표의 유혹에 속아 시니어 티에서 친 스스로를 탓하며 유틸리티 클럽을 꺼냈다. 90m 정도 날더니 첫 번째 페어웨이 한가운데에 올랐다.

전반 9홀 그라스 벙커 ‘명물’

세 번째 샷을 치려니 또다시 ‘벙커 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 페어웨이에 공을 올리려면 줄지어 선 벙커들을 넘겨야 한다. 이 홀은 ‘티잉 에어리어-황무지-첫 번째 페어웨이-벙커 무덤-두 번째 페어웨이-그린’으로 이어진다. 4번 우드를 잡았다. 벤트그라스는 골프공을 살짝 띄워주는 조선잔디와는 달랐다. 골프공은 잔디와 한몸처럼 붙어 있었다. 정타를 맞힐 확률이 낮다는 걸 치기 전에도 알았지만, 그냥 밀어붙였다. 예상대로 빗맞았고 두 번째 페어웨이 앞 벙커에 떨어졌다.

기자처럼 이 홀에서 헤매는 골퍼가 얼마나 많은지 설해원은 이 벙커에선 ‘벌타 없이 프리 드롭해도 된다’는 로컬 룰을 만들었다. 벙커 앞 러프에 드롭한 다음 날린 네 번째 샷도 그린에 오르지 못했다. 5온 3퍼트. 트리플 보기였다.

안 대표로부터 “(시니어 티를 권해) 미안하다”는 말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건 설해원 자랑이었다. “시그니처홀을 딱 하나 꼽으라면 14번홀이죠. 하지만 5번홀(파4·아웃코스 5번홀)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5번홀은 티잉 구역에서 바라보는 대청봉이 매력 포인트다. 경치에 취해 점수를 까먹기 딱 좋은 홀이다. 허투루 친 공은 여지없이 그린 오른쪽에 자리잡은 거대한 해저드에 잡아먹힌다. 파를 노리려면 안전하게 페어웨이를 지켜야 한다. 안 대표는 “수많은 프로가 두 번째 샷을 해저드에 빠뜨려 더블보기로 무너진 홀”이라며 “아마추어라면 처음부터 ‘3온 2퍼트’ 전략으로 다가가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레전드 코스의 명물 중 하나는 전반 9개 홀에 있는 그라스 벙커다. 모래 없이 6㎝ 가까운 길이의 러프로 덮여 있다. 질긴 러프가 만들어내는 마찰력은 골퍼들에게 “차라리 모래 벙커가 낫다”는 생각을 안겨준다.

홀 양옆을 감싸고 있는 산단풍은 앞으로 쑥쑥 자랄 청소년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뒤편에 있는 태백산맥의 자연림은 산단풍을 낳은 부모처럼 듬직하다. 폭신한 벤트그라스를 밟으며 대청봉과 동해 그리고 푸른 하늘이 빚은 다채로운 풍경을 감상하다보면 18개 홀은 어느새 뒤에 남는다. 대중제 골프장으로 7분 간격으로 하루 80개 팀을 받는다.

양양=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