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앤디 워홀…보데가 만든 예술도시 위에 서다
카셀 도큐멘타를 만든 아르놀트 보데(사진). 1900년 카셀에서 태어나 1977년 카셀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폐허 위에 예술 도시를 다시 세웠다. 큐레이터와 카셀 예술대학 교수로서, 디자이너와 화가로서 다양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청년기는 전쟁과 혼돈, 탄압의 연속이었다. 40세가 넘어서야 본격적인 예술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카셀 도큐멘타 외에 현대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카셀 풀다 강변의 뉴갤러리는 그동안 카셀 도큐멘타에서 선보인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요셉 보이스, 안소니 곰리, 네빈 알라닥, 마리오 메르츠 등 카셀 도큐멘타에서 소개된 작품이 즐비하다.

뉴갤러리에선 지금 아르놀트 보데 특별전 ‘언프레임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1920년대 그의 스케치와 회화 습작부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캐리커처 작품,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그린 그의 초상화(1964), 말년에 그린 회화 추상 작품 등을 한데 모았다. 그는 현대미술의 전시 관행을 새롭게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피카소의 작품을 카페 공간에 걸어놓고 즐기게 하는가 하면 그림을 벽에 거는 대신 천장에 매다는 방식을 쓰기도 했다.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접목한 의자를 디자인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거침없이 추상 회화를 그려냈다.

보데가 창설한 카셀 도큐멘타는 이후 현대미술계의 결정적 사건을 숱하게 만들어냈다. 백남준은 1977년 여섯 번째 도큐멘타에서 전위예술가들과 함께 개막식 현장을 위성 중계했고, 이후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년), ‘바이바이 키플링’(1986년), ‘손에 손잡고’(1988년) 등 ‘위성 3부작’이 이어졌다.

초창기 도큐멘타는 미국보다 앞서 미국의 팝아트를 다수 소개했다. 초기엔 마크 로스코, 빌럼 데 쿠닝, 바넷 뉴먼 등 미국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등장했고, 1968년 네 번째 도큐멘타에서는 앤디 워홀의 1967년 작 ‘마릴린 먼로’를 전시했다. 팝아트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는 2007년 카셀에 1001명의 중국인을 데려와 ‘동화’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001개의 중국 전통 의자를 광장에 늘어놓았는데 당시 참여한 중국인 대부분이 중국 밖으로 처음 나온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는 2012년 야외에 시멘트로 만든 여자 누드상을 설치하고 머리 부분에 벌집을 박아 살아 있는 벌이 누드상 주위를 날아다니게 했다. 한쪽 발을 핑크색으로 염색한 흰 개가 살아 있는 예술작품으로 등장해 정원을 배회하기도 했다. 그 개의 이름은 ‘휴먼’이었다. 생태계의 일부를 이용한 현대미술의 획기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백남준에 이어 카셀 도큐멘타에 두 번째 참여한 한국 작가는 1992년 제9회 도큐멘타에 출품한 비디오 아티스트 육근병이었다. 이후 20년간 한국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없었고, 2012년에야 문경원·전준호·양혜규 작가가 초대됐다. 이번 도큐멘타에는 이끼바위쿠르르가 영상과 설치 작품으로 참여했다.

카셀=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