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출간 서면 인터뷰…첫 문장 등 새 번역에 원서 구성 살려
"정의와 불평등 이슈에 관심 많아…아시아계 인종 차별에 개탄"
디아스포라 3부작 완결편 '아메리칸 학원'…"한국인의 교육 다뤄"
'파친코' 이민진 작가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에서 희망 발견"
"역사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존중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평범한 사람들은 생존하고자 계속 고군분투했죠. 억압, 불공평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감정을 담았어요.

"
이민 1.5세대인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54)은 베스트셀러 소설 '파친코'의 강렬한 첫 문장에 이러한 관점을 반영했다고 했다.

이 작가는 '파친코' 개정판 출간을 앞두고 26일 연합뉴스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어마무시'한 힘과 마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과 싸움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새롭게 번역된 개정판은 주제를 함축한 첫 문장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를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옮겼다.

기존 번역에선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읽혔다.

신승미 번역가가 원문의 의미를 더욱 충실하게 담았고, 작품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를 살렸다.

1부 고향, 2부 모국, 3부 파친코 등 세 파트로 된 원서의 구성도 그대로 따랐다.

이 작가는 "인플루엔셜은 제 이야기를 진심으로 존중해줬다"며 "번역가 또한 이야기가 의도했던 구조나 흐름, 언어까지 모두 잘 살려낼 수 있도록 신경을 써줬다"고 말했다.

'파친코'는 2017년 출간 당시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뉴욕타임스와 USA투데이 등 75개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힌 작품이다.

올해 3월에는 동명의 애플TV+ 드라마로 제작되며 원작이 다시 화제가 됐다.

그러나 4월 국내 출판사 문학사상사와 판권이 만료돼 절판 사태가 빚어졌다.

5월 새 출판사 인플루엔셜과 판권 계약이 이뤄지며 3개월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다.

27일 1권에 이어 8월 2권이 나온다.

이미 예약 판매에서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주요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식지 않은 인기를 입증했다.

'파친코' 이민진 작가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에서 희망 발견"
◇ "역사적 재앙에 맞선 개개인의 이야기"…"인생은 불공평해도 계속해야 하는 게임"
이 작가가 예일대 역사학과 학생이던 1989년 '자이니치'(일본에 사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의 존재를 알게 된 때부터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약 30년이 걸렸다.

일본계 미국인 남편과 4년간 일본에 머물며 수많은 인터뷰와 취재를 한 작가는 이전까지 쓴 초고를 모두 버리고 다시 집필했다.

이 작가는 "대학 시절 일본에서 따돌림을 당한 한국계 일본인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게 계기였다"며 "1995년 변호사를 그만뒀을 때 한국계 일본인들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사하고 글을 쓰며, 그 소년에게 느꼈던 감정 때문에 이 책과 함께 지내며 고군분투했다"고 떠올렸다.

이 작품을 수없이 고쳐 쓰게 된 진짜 이유는 "역사적 재앙에 맞선 개개인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왕과 통치자의 역사는 분명히 매력적이지만, 우리가 인맥이나 물질적 자원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적 이야기에도 굶주려 있다고 생각"했다.

퇴고 과정에서 주인공은 재일조선인 3세 솔로몬에서 1세대 선자로 바뀌었고, 제목도 '모국'에서 '파친코'가 됐다.

이 작가는 오랜 집필 기간 좌절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쓰고자 하는 주제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저는 정의와 불평등 이슈에 관심이 많고, 또한 우리가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가족의 힘과 사랑에 감동하죠. 스스로의 삶을 선하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살아내고자 했던 사람들을 기리는 좋은 책을 쓰고 싶었어요.

"
대서사인 '파친코'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까지 역사적 흐름에 내맡겨진 재일조선인 4대의 연대기다.

양진과 그의 딸 선자, 선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가 낳은 아들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민족 수난사를 투영한다.

차별과 멸시를 받아온 이들은 선한 의지와 자존감을 지키며 강인하게 생존한다.

선자는 마늘 냄새가 난다는 모욕 속에서도 김치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모자수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자이니치들이 유일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파친코 사업을 한다.

이 작가는 소설 제목에 대해 "파친코는 많은 한국인이 일해왔던 산업"이라며 "성인용 오락이란 점에서 이 게임을 인생에 비유하고 싶다.

인생은 때론 불공평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게임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의미를 짚었다.

80년에 걸쳐 4대를 등장시킨 건 "등장인물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문화 흡수를 통해 이뤄지는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자의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가장 큰 힘은 위대한 존엄과 도덕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죠. 부패하거나 복수심에 불타거나 혐오스러워지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이들의 인간성과 잠재력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
특히 서사의 촉매가 되는 선자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던 당시 여성상과 달리 혼전 임신을 하고, 일본으로 이주하고, 김치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역경을 헤쳐나가는 인물로 그려졌다.

이 작가는 "부모에게서 사랑받은 선자는 자신의 몸과 결혼의 이상향, 엄마가 되는 것, 가족을 가치 있게 여겼다"며 "그는 쉬운 길 대신 어렵지만 지조 있는 길을 택했다.

쉽게 포기하는 전통적인 모습과 정반대인 용감한 여자다.

우리의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시험을 통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선자 가족이 이민 사회에서 겪은 차별과 증오는 현실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코로나19가 덮치며 국가와 국민의 경계가 뚜렷해졌고 미국 등지에선 아시아 혐오 범죄도 계속되고 있다.

이 작가는 "미국에서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범죄는 항상 존재해왔다"며 "최근 급증한 범죄는 전염병과 관련된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한층 더 심해졌다.

아시아계를 향한 인종차별을 개탄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글을 써왔다"고 강조했다.

'파친코' 이민진 작가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에서 희망 발견"
◇ "어릴 적 한국 떠나 디아스포라에 관심…우리가 매력적이어서 한국인 이야기 써"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작가는 7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 작가는 "1976년 처음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을 때, 뉴욕이 현대적인 도시여서 무척 놀랐다"며 "상상 속에서 미국은 파티 드레스와 마차, 말까지 모두 갖춰진 신데렐라 동화와 비슷할 거로 생각했다.

저는 대부분을 상상 속에서 살았던 순진하고 엉뚱한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건강 문제로 그만두며 오랜 꿈이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4년부터 단편 소설을 발표했고, 2007년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으로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파친코'는 그의 두 번째 장편이며, 현재 집필 중인 세 번째 장편 '아메리칸 학원'(American hagwon)까지 세 작품은 '한국인 디아스포라 3부작'으로 불린다.

그는 디아스포라 문학(이산 문학)에 천착한 데 대해 "저는 외부적 혹은 내부적 영향으로 인해 모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며 "출생지를 떠나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든,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모두의 인생을 변화시킨다.

어렸을 적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이 주제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3부작의 완결편인 '아메리칸 학원'은 "전 세계 한국인들에게 교육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룬 책"이다.

그는 "세계에 있는 수십 개의 학원을 방문했고 이 주제에 관해 많은 사람을 인터뷰했다"며 "제가 만난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의견이 있었고 덕분에 제 작업이 한층 흥미로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논픽션 책과 또 다른 소설을 한 권 더 쓸 계획으로 "글을 느리게 쓰는 편이어서 이렇게 다섯 권의 책을 출간할 수 있다면 무척 다행스러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이름을 고수하는 이 작가는 한국인 이야기를 계속 쓰는 이유를 개정판 서문에서도 설명했다.

그는 "왜 한국인 이야기를 쓰나요"란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성인이 된 후 한국인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며 보냈다는 그는 "우리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한국인 이야기를 쓴다"며 "내게 한국인은 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깊이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가치가 있는 이들이다.

온갖 놀라운 상황들을 견디며 분투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미국 정부 축하 사절단으로 참석한 데 이어 다음 달 다시 서울을 찾는다.

그는 "5명의 사절단 중 미국 정부에서 일하지 않은 사람은 제가 유일해 영광스럽게도 일반 시민 대표였던 것 같다"며 "취임식 당일 에어포스2를 타고 이른 아침 도착해 취임식에 참석했는데, 우리 모두에게 관대했던 윤석열 대통령과 각료들을 만나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로 미국으로 돌아와야 해 35시간이 넘는 여정이었지만 한국에서 한 끼의 식사도 하지 못해 아쉬웠다"며 "다음 여행에선 꼭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것이다.

냉면이랑 빙수를 무척 좋아하는데, 얼른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작가는 성실하게 집필하며 강연 등 대외 활동과 SNS로 독자들과도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그는 "50대 작가이자 교수, 엄마여서 소셜미디어에 관심이 많다"며 "특정 주제를 골라서 소통하고자 저만의 작은 플랫폼을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의 코멘트를 듣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 문학이 세계 독자들과 호흡하려면 무엇이 중요한지 묻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작가라면 누구나 충분하다"고 답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