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소설집 '노랜드' 출간…"우울했던 10대, 소설 쓰며 해방감 느껴"
천선란 작가 "생존 위해 애쓰는 이들, 살아가는덴 이유가 없죠"
천선란(29) 작가의 말처럼 확연히 다른 이야기인데 "소설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발붙이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들이 생존을 위해 애쓰는 이야기다.

죽음, 탈출 등 삶을 향한 출구는 각기 다르지만, 작가는 자신이 잉태한 이들에 기대어 "이유 없이 살아가자"고 독려한다.

왕성한 필력으로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가 천선란의 두번째 소설집 '노랜드'(한겨레출판) 이야기다.

'노랜드'는 작가가 지난해 발표한 단편과 처음 선보이는 작품 등 10편을 엮었다.

최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 카페에서 만난 천 작가는 "설 땅이 없어 탈출하더라도, 삶의 어떤 목적이 없더라도, 살아가고 싶은 데엔 이유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밝은 표정의 작가가 펜 끝에서 그려낸 그늘진 작품세계에선 온도차가 느껴진다.

그는 "10대 때부터 존재 자체에 대한 우울함이 있었다"며 "왜 태어났는지 궁금했고, 열심히 사는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사람이 돼도 인류 문명이 사라지면 그뿐 아닌가 싶었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뭘 위해 살아야 할지 혼자만의 고민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존재론적 고민은 수록작 '제, 재'와 '두 세계'에서 강렬하게 이입됐다.

예상치 못한 전개와 마음을 꼬집는 섬세한 심리 묘사가 발군이다.

'제, 재'는 해리성 인격장애로 한 몸 안에 사는 두 인격인 제와 재의 이야기다.

재는 천재이지만 싹수가 없고, 제는 평범하지만 다정하다.

제는 자신을 죽이려는 재의 의도를 알고 "나는 왜 죽어야 하는가"라며 존재의 의미를 짚어간다.

'두 세계'에선 존재 밖의 세상을 갈망하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등장한다.

소설 기반 가상현실 플랫폼 노랜드 운영자인 유라는 인공지능인 소설 속 인물과 독자가 서로의 세계를 맞바꾼 기이한 현상과 마주한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세상으로 떠나고자 목숨을 져버린 쌍둥이 자매 유진의 생전 말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이 행성에 발붙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천 작가는 "쓸 때는 인식하지 않았지만, (바깥세상을 열망하는) 인물들에 공감했다"며 "어렸을 때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를 보면서 지구 밖에 우주가 있듯이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 같았다.

판타지 세계에선 현실 고민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고 떠올렸다.

천선란 작가 "생존 위해 애쓰는 이들, 살아가는덴 이유가 없죠"
샘솟는 상상은 존재의 고민에 지친 10대의 그를 깊은 우물에서 꺼내줬다.

경계 없이 뻗어나간 생각은 그를 이야기꾼으로 만들었고, 소설가란 업(業)을 안겨줬다.

2019년 장편 '무너진 다리'로 등장한 그는 2020년 '천개의 파랑'으로 주목받은 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와 '나인' 등을 잇달아 내며 단시간에 과학소설(SF) 독자들을 이끌었다.

그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는 게 재미있었고, 잊지 않으려 적어뒀다"며 "만화로 그리고 싶었는데 미술에 소질이 없어 안양예고 문예창작과로 편입해 문장 쓰는 연습을 했다.

소설 자체가 제가 사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상상이니 해방감을 줬다"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왼팔엔 평소 애착을 갖는 우주, 고래, 식물의 타투가 새겨져 있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SF 작가로서의 특기는 발휘됐다.

반은 염소이고 반은 악마인 크람푸스를 물리치고자 태어난 늑대인간('흰 밤과 푸른 달'), 인간이 배출한 인공화합물을 먹어 치우는 바키타 등 디스토피아 색채가 깔렸다.

외계인의 침공, 욕망이 빚어낸 파멸 등으로 전복된 지구에서 내몰리고 분투하는 인류는 더는 주류가 아니며 생존에 매달린다.

처음 도전한 좀비물인 '이름없는 몸'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그는 "좀비물 속 인물의 욕망은 숨을 쉴 수 있고 곁에 있는 사람을 지키는 생존, 단 하나란 점이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폐허가 된 고향 마을을 찾은 주인공이 공포스러운 좀비의 공격을 받는 이야기인 이 작품은 당초 장편으로 썼다가 분량을 줄여 실었다.

작가는 마지막 작품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에서 다채로운 서사를 압축하는 인물을 내놓는다.

외계생명체와의 전쟁이 끝난 뒤 유일하게 부대에 남은 '이인'은 교통사고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음의 위기를 맞지만,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다.

'여전히 살고 싶었다.

삶을 지키고 싶었다.

잠에서 깨면 이인은 다시 절벽을 오를 것이다.

'
천 작가는 "이인의 생존 욕구처럼 모든 인물은 결국 살기 위해 절벽을 오른다.

거기엔 이유가 없다"며 현실의 수많은 이인을 응원하고 싶었다고 했다.

천선란 작가 "생존 위해 애쓰는 이들, 살아가는덴 이유가 없죠"
작가도 성실한 집필로 부단히 창작의 절벽을 오르고 있다.

소속 에이전시인 블러썸크리에이티브와 CJ ENM이 협업하는 '언톨드 오리지널' 프로젝트의 SF 작품을 마감했고, 교보문고가 연 플랫폼에 7월부터 장편 연재도 시작한다.

대략 하루 5천자씩을 쓴다는 그는 집필 속도를 출간이 못 따라간다는 말도 듣는다.

독자들에게 친숙해진 필명은 아버지(천), 언니(선), 어머니(란)의 이름 한 글자씩을 조합했다.

장르 문학계 새바람인 그는 "더는 순문학, 장르문학 구분이 의미가 없는 것 같다"며 "요즘은 순문학 안에도 추리, SF 요소가 들어가 경계가 없다.

세계가 가까워지고 팬데믹 상황이 오고, 안드로이드가 우리 삶에 깊이 침투해 너무 복합적이어서 인간만을 두고 얘기하기엔 우리 고민이 담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셜록 홈즈'나 '블랙 미러'처럼 오래 살아남는 캐릭터로 여러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