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사유 마치고 빨간색 선택"…자유 향한 '옴니 레드' 첫선
지름 3㎜ 원이 빚은 '추상 풍경'…천광엽의 새로운 시작
빨간색 유화 물감으로 색칠된 지름 3㎜의 원 수십만 개가 스스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원들의 색은 균일하지 않고, 일부 원에선 물감이 원주 밖으로 번졌다.

이런 무위(無爲)의 색칠은 하늘이나 바다 등 자연을 담는 결과를 낳았다.

천광엽(64) 작가가 서울 성동구 더페이지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옴니 블루 앤 레드(OMNI BLUE n RED)'에서 처음 공개한 '옴니 레드' 연작들은 이처럼 '추상 풍경'을 빚어냈다.

지름 3㎜ 원이 빚은 '추상 풍경'…천광엽의 새로운 시작
다만 작가는 풍경 형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형상의 취득'이라는 추상의 기본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회화와는 다르다.

천광엽은 회화가 가진 고유의 특성인 '평면, 물감, 지지체(캔버스, 종이 등)'를 존중하는 작가로 평가된다.

회화의 평면성을 존중하는 그의 예술적 태도는 추상화를 고수하게 된다.

원근법이나 명암법 등 '눈속임'을 배제해 회화의 본질인 2차원적 평면을 중시하는 추상화에서도 '시각적 환영'은 강조된다.

미국의 저명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회화의 순수성을 지키되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한 시각적 환영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옵아트(Op Art)처럼 보이는 작품들은 단순히 원들을 나열하지 않는다.

50호 캔버스(117×91㎝)에 20만 개 이상 색칠된 원들은 서로 겹치면서 파동을 형성해 시각적 환영을 완성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점과 같은 3㎜의 원을 자신의 작품 세계의 근본 요소라고 설명했다.

지름 3㎜ 원이 빚은 '추상 풍경'…천광엽의 새로운 시작
작가가 약 4년 전부터 작업한 '옴니' 연작에서 탐구한 색은 파란색이었다.

컴퓨터 수치제어(CNC) 기계로 타공한 시트지를 캔버스 위에 붙이고 청색 계열의 유화 물감들을 묽게 풀어서 수십회 바르고 건조하는 '물감의 축적'이 기본적인 작업 방식이다.

이렇게 두께를 형성한 표면을 사포로 갈아내고, 그 위에 점들을 붙이고 다시 물감을 칠하기도 한다.

작가는 임의로 점들을 붙이면서 동시에 규칙적으로 구멍이 난 시트지를 이용해 색을 올린다.

그는 "불규칙과 규칙이 만나서 발생하는 파동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작업은 건조 시간을 포함해 약 6개월이 걸린다.

오랜 시간 물감이 지층을 형성한 화면은 오묘한 청색이다.

이브 클랭이 진한 울트라마린 같은 색을 개발해 'IKB(International Klein Blue)'라고 특허를 냈듯이 '천광엽 블루'라고 이름 붙여도 될 듯하다.

사포로 갈아낸 유화 물감들을 통에 담아 굳힌 오브제는 색의 중첩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지름 3㎜ 원이 빚은 '추상 풍경'…천광엽의 새로운 시작
이번 전시에서 첫선을 보인 신작 '옴니 레드'는 얼핏 보면 기존의 파란색 작품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3㎜ 원을 구멍 낸 시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어져 색만 다를 뿐 같은 연작의 일부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파란색 작품들은 연금술처럼 정교한 작업을 거쳐 사유에 빠지게 만든다면 정제되지 않은 빨간색 작품들은 자유롭게 풍경을 펼쳐낸다.

천광엽은 "옴니 레드 작업은 (종전과) 반대되는 개념"이라며 "물감을 축적하는 게 아니라 페인팅 나이프로 물감을 표면에 바르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블루는 붓의 행위성이 거의 안 보였는데, 레드는 즉흥적 행위로 종전보다 자유로워졌다"며 "블루가 사유의 개념이라면 레드는 몸의 언어"라고 덧붙였다.

지난 4∼5년간 매진한 블루 작업을 통해 기교를 터득해왔으며 레드 작업을 시작하면서 완성된 기교와 사유를 다시 풀어 헤치고 있다고 부연했다.

지름 3㎜ 원이 빚은 '추상 풍경'…천광엽의 새로운 시작
이처럼 작업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주면서 색도 파란색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빨간색을 주로 쓰기 시작했다.

작가는 몇 년 전 수술을 받은 경험도 빨간색에 자유롭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는 "빨간색은 피를 연상해서 죽음의 메타포라고 생각했다"며 "수술을 계기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스스로 죽음의 사유를 끝내고 나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고 맞닥뜨려도 담담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결국 블루는 레드를 하기 위해 선행됐던 작업"이라며 "작가가 머물러 있는 것은 위험하다.

항상 창의적으로 어떤 지점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작가다.

(신작은) 좀 더 높은 곳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말했다.

전시 서문에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다"고 쓴 그는 '옴니 레드'를 시작하면서 예술가의 궁극적인 지점인 자유와 해방에 한발 다가갔다.

전시는 7월 10일까지.
지름 3㎜ 원이 빚은 '추상 풍경'…천광엽의 새로운 시작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