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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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선악과도, 삶을 살아온 모습과도 완전히 무관하죠. 우리는 이를 흔히 '운명'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으로 어떠한 위대한 인간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처지를 뜻하죠. 운명은 양가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악의 순간 위기를 피해 가는 기적을 내포하는 동시에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 죽음의 그림자까지 내재하고 있죠. 아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라는 어두운 터널에 들어선 지 어언 2년 반이 된 우리에게 운명은 조금 더 가혹한 시련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로 자신의 건강, 경제적 능력, 가족 등을 잃은 이들이 전 세계에 넘쳐나는 '고통의 시기'를 직접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겐 역경과 불행으로 점철된 운명에 맞서 일어설 힘이 있다는 명확한 주제와 영감을 온전히 담아낸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을 이 시점에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거대한 비운으로 새로운 도전과 꿈, 희망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작품의 거대한 울림은 삶에 대한 존경 그 이상의 가치를 전달할 것입니다. 시작부터 단 4개의 강렬한 음으로 청중의 온몸을 압도하고, 독자적인 리듬과 선율로 인간의 위대함을 완벽히 증명해낸 작품,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을 가까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악성' 베토벤, 가혹한 운명을 밟고 창대히 빛나다

먼저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유일한 음악가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8세에 처음으로 피아노 독주회를 연 베토벤은 유일무이한 작곡가의 탄생을 드러내듯 즉흥 연주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위대함을 단순히 천부적 재능의 결과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가혹한 운명 속 개인의 불행과 비극을 찬란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음악 신동이란 타이틀로 돈을 벌고자 했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전해집니다. 끊임없는 연습 및 연주 종용은 물론 폭력까지 일삼았던 아버지로부터 베토벤은 수많은 아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17세가 되던 해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크나큰 괴로움을 마주하게 됩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사진=한경DB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사진=한경DB
이후 빈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명성을 높이던 베토벤에게 또 한 번 거대한 시련이 찾아옵니다. 26세 젊은 나이부터 청력을 잃어갔던 것이죠. 작곡가 베토벤은 살아가는 내내 청각 장애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밤과 낮이 없이 울려대는 환청과 통증에 괴로워하면서도 대중에게 청력 상실을 들킬까 매일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죠. 역설적이게도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 삶을 지배했을 때 명작은 연이어 탄생했습니다. 피아노 소나타 제8번 c단조 '비창', 제14번 c#단조 '월광', 제23번 f단조 '열정' 등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를 비롯해 교향곡 제5번 c단조 '운명', 제6번 F장조 '전원', 제9번 d단조 '합창' 등 베토벤의 위대함을 증명해낸 작품은 모두 청력 상실이 시작된 1796년 이후 작곡된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교향곡 제5번은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불멸의 대작'으로 여겨집니다. 모든 리듬과 선율, 셈여림이 철저히 계산된 빈틈없는 구성에 전례 없는 극적인 전개가 펼쳐집니다.현재까지도 음악사의 변혁을 일으킨 걸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죠.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은 표제 음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알고 있듯 '운명 교향곡'이란 호칭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지인 쉰들러의 증언으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베토벤은 작품 첫 시작에 등장하는 ‘4음 모티브’에 대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이 해당 문장을 진실로 언급했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당시 베토벤이 청각 장애, 정치적 격변기 혼란 등을 겪던 시기였던 만큼 자신의 운명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토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사진=한경DB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사진=한경DB
운명이라는 거대한 파도와 이에 대응하는 인간의 굳건한 투쟁을 강렬한 선율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무언의 용기를 건네는 작품,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1악장. 작곡가로서 귀가 들리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전부 쏟아부은 음악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거칠게 파고드는 운명의 소용돌이…강렬한 모티브로 탄생

'따다다 단' '따다다 단' 작품은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8분음표 3개 연주로 시작됩니다. 전체 현악기와 클라리넷이 동시에 포르티시모(ff)를 연주하면서 순식간에 청중의 귀를 압도합니다. 이어 2분음표 페르마타(𝄐) 연주가 이어지면서 장엄하고도 무거운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이때 음 중간중간에는 쉼표가 자리하면서 짧은 적정의 긴장감까지 유발하죠. 강인한 인상의 첫 모티브(8분음표 3개, 2분음표 1개)가 소리를 감추면 전과 완전히 대비되는 피아노(p) 선율이 이어집니다. 이때 현악기는 빠른 속도로 선율을 주고받으면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고자 뛰어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이내 주선율은 빠른 속도로 소리를 키워 웅장한 화음으로 구현됩니다. 아주 작은 소리로 상행하던 선율에 스포르찬도(sf.)와 스타카토 기법이 적용되면서 인간의 불안한 감정이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이후 여린 고음 선율과 강인한 저음 선율이 대비되면서 갈등이 고조되면 팀파니가 등장해 초인적인 힘이 인간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전달합니다.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1999년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1악장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DW Classical Music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1999년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1악장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DW Classical Music
그렇게 서로 엉키던 선율이 하나의 거대한 화음으로 쌓이면 이내 호른이 등장해 분위기를 전환합니다. 이때 단조에서 장조로 조성이 변화하면서 4분음표로 구성된 밝은 선율이 연주됩니다. 이는 가혹한 운명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 있는 삶을 지키겠다는 베토벤의 의지가 투영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고음부 선율은 끊임없이 상행하면서 강인한 분위기를 구현하는데 이때 첼로, 더블베이스 등 저음부 악기에선 8분음표와 2분음표의 반복 연주가 이어지면서 곡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동일 형식이 반복되면 호른이 첫 시작 모티브를 아주 큰 소리로 연주하면서 더욱 어둡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이때 현악기와 관악기가 주선율을 주고받으면서 인간의 의지와 주어진 운명 간 싸움이 벌어지는 듯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이는 점차 소리를 키우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선율로 합쳐졌다가 다시 고음부 상행과 저음부 하행으로 갈라지면서 거대한 갈등을 형상화합니다.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1999년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1악장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DW Classical Music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1999년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1악장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DW Classical Music
이후 오케스트라 전체 소리가 확 줄어들면 플루트와 오보에, 바순, 클라리넷이 일정한 리듬을 반복 연주합니다. 마치 운명이 다가오는 것을 시계 소리로 형상화해 표현하듯 말이죠. 이후 팀파니가 트레몰로 기법으로 등장하면 1악장 내에서 가장 웅장한 크기의 모티브가 연주됩니다. 이때 삽입되는 오보에의 카덴차 연주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인간의 의지를 형상화한 부분으로 분석됩니다. 뒤이어 오케스트라 전체가 단숨에 거대한 회오리를 불러오듯 소리를 키우고, 모든 악기가 거대한 화음으로 8분음표를 빠르게 연주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이후 스타카토 기법으로 오케스트라 전체 선율이 움직이면서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오보에 독주가 인간의 존재를 다시 한번 부각하면 전체 오케스트라가 거대한 3개의 모티브와 10개의 화음을 잇따라 강하게 연주하면서 1악장은 막을 내립니다.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히지 않는 강렬한 선율과 장대한 서사시를 뛰어넘는 악상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운명이 다가오는 압박감을 온전히 느끼도록 한다는 베토벤 협주곡 제5번 '운명'. 가혹한 운명도 결코 인간을 굴복시킬 수는 없으며 인간의 가치와 의지는 그 어떤 것도 막아설 수 없단 것을 몸소 증명해낸 베토벤의 작품이 코로나19 사태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버텨온 우리에게 뜨거운 응원이자 강력한 힘이 되길 바랍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