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의 섬 저녁기도' 더블캐스팅…내달 예술의전당서 국내 초연
'비냐스 콩쿠르' 우승 20년 선후배…"무대 위 짧은 환희 덕에 긴 고통 견뎌"
베르디 오페라 엘레나役 김성은·서선영 "유관순 같은 인물이죠"
"오페라에 담긴 예술·문학·철학·역사·사랑…이런 게 모두 음악으로 우리 몸에 젖어 들지요.

그게 오페라의 매력이에요.

"
베르디의 대작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가 다음달 국내 관객들을 처음 만난다.

국립오페라단이 6월 2일부터 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리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엘레나' 역을 맡아 막바지 연습에 여념이 없는 소프라노 김성은과 서선영을 지난 23일 예술의전당 국립예술단체 연습동에서 만났다.

올해로 데뷔 31년 차인 소프라노 김성은은 이번 작품을 연습하며 마치 신인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화도 내고 잔 다르크처럼 사람들을 선동하는 역할은 처음이에요.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역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
베르디 오페라 엘레나役 김성은·서선영 "유관순 같은 인물이죠"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는 시칠리아의 공녀 엘레나와 저항군 아리고, 프랑스 총독 몽포르테의 이야기다.

프랑스의 지배와 억압을 받던 시칠리아의 공녀인 엘레나는 몽포르테를 죽이고 프랑스에 저항할 계획을 세우지만, 연인 아리고가 몽포르테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지금껏 맡아온 역은 수동적인 비련의 여주인공이 많았는데 엘레나는 독립운동 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굉장히 용기 있는 캐릭터예요.

제가 나이도 적지 않다 보니 이런 역할에 오히려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같은 역에 캐스팅된 서선영은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번에 연기하는 엘레나를 그는 시칠리아의 '유관순 열사'로 표현했다.

"엘레나와 시칠리아인들이 독립을 외쳐야 했던 이유는 자신들의 혈육이 프랑스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데서 오는 분노였죠.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동한다는 점에서 유관순 열사, 독립투사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
엘레나의 용기에도 결국 그의 결혼식은 피로 물들게 된다.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베르디는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이라고 말한다.

베르디 오페라 엘레나役 김성은·서선영 "유관순 같은 인물이죠"
"결국 그 누구도 다른 누구 위에 있지 말자는 이야기에요.

이 오페라를 보는 순간만큼은 평화로 마음을 채워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성은)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는 '리골레토'나 '라 트라비아타' 등 베르디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생소한 오페라지만 무대를 즐기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두 주역은 강조했다.

연출가 파비오 체레자의 친절한 연출이 줄거리 이해를 돕고 웅장한 음악은 뜻을 몰라도 빠져들게 만든다고 했다.

서선영은 "의상 색을 통해 인물 성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연출이 인상 깊었다"면서 "미리 공부하고 오지 않아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김성은은 "오페라에는 예술·문학·철학·역사·사랑이 다 담겨 있는데 이런 것은 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음악으로 우리 몸에 젖어 든다"며 "우리도 공연하면서 감동받는다.

준비하기는 힘들지만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다"고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인 두 사람이 같은 작품의 같은 배역을 맡은 건 처음이다.

김성은이 1991년 우승한 스페인 비냐스 콩쿠르에서 서선영이 2011년에 우승해 둘은 '콩쿠르 선후배'다.

둘 다 같은 소프라노지만 편한 음역이 서로 달라 연습하면서 서로 '개인 레슨'을 주고받기도 한다.

"저는 고음 가수다 보니 저음이 어려웠는데 서 선생이 '툭 내려놓으라'고 조언해줘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김성은)
"제가 어려운 부분은 김 선생님이 쉽게 하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부분을 어떻게 하는지 주의 깊게 보고 배웠죠."(서선영)
둘은 세대는 달라도 노래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은 똑 닮았다.

서선영은 성악가라는 직업의 존재를 알기도 전부터 노래가 좋아 '무조건 평생 해야 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열망하던 일을 이렇게 생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축복이지만 노래가 잘 풀리지 않을 땐 힘들기도 하다"고 털어놨다.

프로 성악가로서 출연료를 받고 관객 앞에 서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그만큼 노력의 크기도 더 커진다고 했다.

베르디 오페라 엘레나役 김성은·서선영 "유관순 같은 인물이죠"
"100% 만족하는 공연은 없죠. 자기 무대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은 내리막길을 걸을 뿐이니까요.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
김성은은 1987년 대구 전국성악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그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관객뿐 아니라 유학을 도와준 가족들과 딸에 대한 책임감으로 노래 외에 한눈을 팔 새가 없다고 했다.

"젊었을 땐 도와준 분들에게 보답해 금의환향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고, 지금은 딸이 저를 보고 이해하면서 본인도 더 좋은 길을 선택하리라는 생각에 앞만 보고 나아가지요.

"
이탈리아에서 어린 딸을 키우며 노래하던 시절 김성은은 우는 딸을 억지로 떼어놓고 연습하러 가며 후회한 적도 있다고 했다.

서선영은 자신이 무대에서 단 1초만 실수해도 관객들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라는 생각에 늘 시달린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이 음악을 계속하는 건 노래와 무대가 그만큼 좋아서다.

"무대에서 느낀 짧은 환희 덕에 긴 고통을 견뎌요.

그러면서 또 이걸 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음악의 기쁨, 음악을 통해 관객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준다는 보람이 큽니다.

"(김성은)
"노래가 아무리 어려워도 노래가 미웠던 적은 없어요.

못하는 내가 미울 뿐 음악과 노래는 늘 저에게 고마운 대상입니다.

"(서선영)
베르디 오페라 엘레나役 김성은·서선영 "유관순 같은 인물이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