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울하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이 문장처럼 마들렌을 먹다 불현듯 어떤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마르셀 프루스트는 1922년 폐렴으로 숨을 거두기 전까지 13년을 매달려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했다. 사망 100주기를 맞은 올해,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프루스트 작품이 속속 나온다.
최근 출간한 《질투의 끝》(민음사·사진)은 프루스트의 단편 네 편을 담았다.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주인공 발다사르는 자신이 아끼던 어린 조카 알렉시를 바라보며 아직 살날이 많은 아이에게 질투를 느낀다.
표제작 ‘질투의 끝’에서는 주인공 오레노가 자신의 연인 프랑수아즈를 지독히 사랑하면서도 강렬한 질투에 사로잡힌다. 질투는 그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오레노는 죽음을 맞이할 때가 돼서야 사랑과 질투에서 해방된다. 추천사를 쓴 소설가 박상영은 “마치 2020년대 한국의 풍속을 반영한 드라마나 문학 작품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며 “프루스트는 세상의 모든 명작, 고전 문학이 그렇듯 한없이 세속적인 인간의 감정을 무한히 아름다운 문학의 언어로 승화해 낸다”고 했다.
지난 2월에는 프루스트 사후 발굴된 원고 12편 등 그의 단편을 모은 《밤이 오기 전에》(현암사)가 출간됐다. 오는 31일엔 문학전문출판사인 미행이 프루스트의 미발표 단편을 모은 《익명의 발신인》을 펴낸다. 11월에는 프루스트가 20대 초반에 쓴 미발표 원고를 묶은 소설집 《미지의 교신상대 외》(가제)를 문학동네가 출간할 예정이다.
민음사가 2012년부터 새로운 번역으로 선보이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올해 13권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11권까지 출간됐다. 기존에 주로 소개된 1954년 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1987년 판을 번역하고 있다.
전쟁은 인류의 비극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어니스트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예술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기록하며 인간의 존엄을 고민해왔다. 올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는 넉달째 전쟁의 비극 한 가운데 있다. 국내 출판계에서도 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9일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한국지부(KBBY)는 이수지 작가, 온라인 서점 알라딘과 함께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에게 책을 기부하기 위한 모금을 진행 중이다.주축은 IBBY의 프로젝트다. IBBY는 우크라이나 출판사의 어린이책 인쇄용 파일을 제공받거나 직접 책을 확보해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에게 배포하고 있다. 현재 폴란드에만 200만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교육의 기회를 빼앗긴 채,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지도 기약할 수 없다.올해 '아동문학계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 작가가 재능 기부 형식으로 포스터를 그렸다. 알라딘에서 오는 31일까지 이 포스터를 판매한다. KBBY는 최소한의 진행비와 배송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을 IBBY 프로젝트에 기부할 예정이다.책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국내에 알리고 책 수익 일부를 우크라이나에 전하는 사례도 있다. 출판사 이야기장수는 지난달 우크라이나 참상을 다룬 <전쟁일기>를 출간했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가 그리고 썼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겪은 피난 과정을 연필 하나로 기록했다. SNS로 작품 일부를 접한 출판사가 세계 최초로 국내 출간했다. 이야기장수는 책의 번역료 전액, 출판사 수익 일부를 우크라이나 적십자에 기부하기로 했다.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실패는 갑자기 찾아온다. 그것도 성공의 정점에서. ‘성공은 실패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말은 이래서 생겼다. 노키아, 인텔 등 전 세계 기업들이 따라 하려고 기를 쓰던 롤모델이 하루아침에 추락하고, 정점에 섰던 인물이 구설에 휘말려 추락하기도 한다. 일본 통일을 눈앞에 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순간 몰락했고, 중국 본토를 거의 점령했던 장제스는 대만으로 쫓겨나고 만다.지식경영 분야를 개척한 ‘아시아의 피터 드러커’ 노나카 이쿠지로 일본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가 군사 전문가들과 함께 쓴 《지략의 본질》은 ‘성공했던 경험의 과잉 적용’이 실패를 부르는 요인이라고 강조한다.성공한 자는 ‘성공 방정식’이 계속 통할 것이란 생각에 같은 전략을 되풀이하지만, 실패한 자는 절치부심하며 새로운 전략을 들고나온다. 판이 뒤집히는 역전(逆轉)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소련 전쟁과 영국·독일 전쟁, 1960~1970년대 베트남 전쟁 등을 분석하며 성공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과 현장의 지식 및 판단을 받아들이는 조직 체계 등이 승리의 요인이라고 설명한다.독일 잠수함 U보트는 성공과 실패를 모두 보여주는 사례다. 대서양을 오가는 배들을 지키는 대서양 전투에서 연합국은 상선 3500척, 군함 175척을 잃었다. 69%는 U보트에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 직전까지 독일 잠수함 부대는 찬밥 신세였다. 잠항 시간이 짧고,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때 홀로 길목에 매복해 배들을 공격했는데,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후 수중 탐지기가 개발돼 쉽게 적발되자 거의 무용지물이 됐다.수뇌부의 눈 밖에 나자 간섭도 함께 사라졌다. 잠수함대 사령관을 맡은 카를 되니츠는 마치 ‘사내 벤처’처럼 새로운 시도를 했다. 젊고 유능한 인재도 발탁했다. 되니츠는 잠수함을 ‘잠수도 가능한 배’로 여겼다. 크기가 작아 밤에는 물 위로 올라와도 잘 보이지 않는 점을 이용했다. 물 위에선 수중 탐지기도 소용없었다. 또 ‘이리 떼 전술’을 썼다. 여러 대의 U보트가 밤에 물 위로 올라와 선단을 공격했다.하지만 U보트가 독일군 수뇌부로부터 인정받고, 본격적으로 생산량을 늘리기로 했을 때 ‘실패의 싹’은 트이고 있었다. 연합국은 ‘B-24 리버레이터’ 등 장거리 폭격기를 투입, U보트가 물 위로 올라와 휴식하는 시간을 노렸다. 비행기에 바다를 환히 밝히는 탐조등을 달아 밤에도 U보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독일군의 암호 해독장치 ‘에니그마’를 해독해 U보트의 작전도 미리 알 수 있었다. 반면 독일군은 성공체험에 취해 U보트 중심의 전략을 고수했다. 독일 공군 최고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고집 탓에 항공 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다.저자들은 초기의 승리 방정식을 고집한 게 독일의 패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고 말한다. 전쟁 발발 6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군은 기동성을 최대한 추구하는 전격전을 러시아 침공에도 고수했는데, 이때는 이미 전쟁의 양상이 소모전으로 바뀐 뒤였다.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 때도 소모전에 대응하지 못해 물자와 인력을 낭비했다. 책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도 비슷한 우(愚)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현장과 멀리 떨어진 리더’도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책은 꼬집는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바실리 추이코프는 사령관인데도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선에 머물렀다. 그는 “독일의 포탄에 일일이 목을 움츠릴 바에야 머리가 날아가는 편이 낫다. 이것이 지휘관의 마음”이라고 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도 자주 현장을 찾았다.반면 히틀러가 전선에 나간 건 1939년 폴란드 침공뿐이었다. 물론 사령관이 모든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지휘할 순 없다. 현장에선 현장 지휘관의 신속하고 자율적인 판단이 승패를 가른다. 저자들은 조직의 유연성을 생각한다면 톱다운이나 보텀업보다 ‘미들 업·다운’ 방식이 좋다고 말한다.풍부한 사례 덕분에 술술 읽힌다. 조직 운영과 리더십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책이다. 다만 경영학자가 썼는데도 기업 경영전략과 연결한 부분이 거의 없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경영서라기보다 전쟁의 역사와 전략, 리더십을 다룬 군사 서적에 가깝다.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코로나19는 일과 직업 세계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왔다. 거리두기로 인한 고립감에 ‘코로나 블루’(코로나19에 따른 우울감)가 유행하더니 거리두기가 해제되자 이제는 ‘엔데믹 블루’(코로나19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생기는 우울감)라는 말이 생겼다.젊은 세대 직장인일수록 출퇴근이나 회식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크다. 구인 광고에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소개 문구를 올린 회사가 구직자들 사이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세대 간에도 직업윤리에 관한 생각이 다르다 보니 직장 내에서 다양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일과 직업 세계의 변화는 사실 코로나19 이전부터 진행됐다. 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 발달로 일자리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고, 플랫폼 경제가 출현하면서 임시직과 비정규직이 고용시장의 대세가 됐다.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이자 책을 통해 계속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Richard David Precht). 그는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신음하던 무렵 《의무란 무엇인가(Von der Pflicht)》를 통해 국가의 역할과 시민의 의무에 대해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세계 곳곳에서 국가의 방역 조치에 불만을 품고 마스크를 벗은 채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탈의무 현상’을 통해 국가를 각종 서비스의 제공자로 인식하고, 시민을 서비스의 소비자로 여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지적했다.그리고 지난 3월 중순 유럽이 코로나19 위협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즈음 프레히트는 《모두를 위한 자유(Freiheit fr alle)》를 선보였다. 책은 우리가 알고 있던 일의 종말을 선언하며 ‘미래 사회에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도 독일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일과 노동에 대한 해석은 시대마다 달랐다. 일은 먹고살기 위한 ‘생계 수단’이지만 언젠가부터 ‘자아실현’이라는 거창한 목표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프레히트는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일할 것인지, 그리고 도대체 ‘왜’ 일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질문한다.스스로 학습하는 컴퓨터와 AI 로봇의 발달로 ‘제2의 기계시대’가 펼쳐지고 고용시장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기계가 거의 모든 일을 담당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인간의 생산성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일과 직업의 개념은 ‘제1의 기계 시대’, 즉 임금노동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만들어진 일과 노동의 개념은 낡고 쓸모없어졌다. 정규직, 양질의 일자리, 작업 환경 개선은 의미 없는 요구가 돼버렸다.책은 ‘제2의 기계 시대’에 접어든 상황에서 직업 세계의 변화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생하게 알려준다.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지 보여주며, ‘보편적 기본소득’에 기반한 사회복지 시스템 등 새로운 일자리 정책을 설계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직면한 도전 과제를 제시한다.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