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직동 운경고택 안채에 전시된 최정화 작가의 2020년 작 ‘인피니티 1’.      운경재단  제공
서울 사직동 운경고택 안채에 전시된 최정화 작가의 2020년 작 ‘인피니티 1’. 운경재단 제공
인왕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서울 사직동 사직공원에 오르는 길. 이 길엔 400년 역사를 간직한 운경고택이 있다. 요즘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한옥 담장 너머 흘끗흘끗 보이는 화려하고 수상한(?) 물체들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곤 한다.

운경고택 뒷마당에 함께한 이미혜 운경재단 상무(왼쪽부터), 최정화 작가, 최영 소설가.
운경고택 뒷마당에 함께한 이미혜 운경재단 상무(왼쪽부터), 최정화 작가, 최영 소설가.
이것의 정체는 세계적 현대미술작가 최정화의 설치 작품 ‘비단길’(2020). 운경고택에서 지난 15일 개막한 전시 ‘당신은 나의 집(봄, 봄, 봄)’에 등장하는 작품 중 하나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만난 최 작가는 “당신은 누구인가, 집은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사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공간적, 시간적, 구성적 측면에서 모두 특별하다. 운경고택은 제12대 국회의장을 지낸 운경(雲耕) 이재형 선생(1914~1992)이 1953년 매입해 작고할 때까지 살던 곳이다. 조선 14대 왕 선조의 아버지(덕흥대원군)가 살았던 도정궁이 있던 터이기도 하다. 선조의 후손인 운경 선생은 6·25전쟁 후 서울에 돌아와 조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에 집을 마련했다. 운경 선생의 광화문 집무실은 ‘운경 복덕방’으로, 운경고택 사랑채는 ‘정치인들의 사랑방’으로 불렸다. 많은 학자가 “한옥의 사랑채가 진정한 의미의 사랑채로 쓰인 몇 안 되는 곳”이라고 한 이유다.
'한국정치 사랑방' 운경고택은 지금 '버려진 것들'로 가득하다
운경고택은 운경 선생 작고 후 후손들이 운경재단을 설립해 관리했지만 일반인들에겐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운경재단은 2019년부터 이곳을 갤러리로 개방해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로 했다. 이미혜 운경재단 상무는 “대한민국 격동기 수십 년간 손님을 맞느라 분주했던 운경고택이 이제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새로운 손님들을 맞이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올해는 운경 이재형 30주기이자 최 작가의 활동 30주년이 되는 해다. 최 작가와 최영 소설가, 이 상무는 2년여에 걸쳐 전시를 기획했다. 최 작가는 세계 무대에서 환호받은 자신의 설치 작품과 최근작들을 고택의 역사와 맞물리도록 재구성했다. 최 소설가는 ‘메타픽션’ 형태로 소설 《춘야》를 써 내려갔다. 가상인물인 남성 복지오가 전시회에 들러 24점의 작품을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솔직하게 비평하는 내용이다. 전시 관람객에게 전시용 도록 대신 소설책 한 권씩 나눠주고 한옥 어디서든 차분히 앉아 읽을 수 있게 했다.
천하대장군아줌마 /운경재단 제공
천하대장군아줌마 /운경재단 제공
공간과 작품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다. 최 작가는 버려진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찌그러진 양철 그릇과 농기구 등을 국내외에서 수집하며 1990년대부터 활발하게 활동해온 작가다. 영화 세트 제작자로, 공간 디자이너로 경계 없는 예술을 한다. 스스로를 ‘넝마주이’라고 부르는 그는 “고택의 기능과 의미를 해석해 서로 어울리거나 비틀 수 있는 작품들을 배치했다”고 했다.

고택은 이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작품들은 고택과 대비를 이루는 동시에 조화가 탁월하다. 어떤 것이 원래 있던 것이고, 설치 작품인지 헷갈린다. 고택 입구에 들어서면 푸른색 제복을 입은 교통경찰이 서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이다. 제복과 권력이 가진 무게를 비꼰 1998년 작 ‘퍼니게임’이 고택의 근위병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고택 입구 소나무 앞엔 고인돌처럼 보이는 하얀 바위가 놓여 있는데 이는 하와이 해변에서 최 작가가 수집한 스티로폼 부표다. 최 작가는 “가장 추한 것이 때론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속된 것이 가장 성스러운 것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시장의 상인들, 버려진 물건 등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전시장에는 아프리카 농촌에서 쓰던 쟁기, 찌그러진 밥그릇과 플라스틱 바구니, 누군가 덮던 이불, 낡아 버려진 손수레 등이 가득하다. 30년간 아무도 살지 않던 한옥에 운경재단이 생명을 불어넣듯, 그 역시 버려진 것들을 소재로 고택과 어울리는 최적의 지점을 찾았다.
거대한밥상    /운경재단 제공
거대한밥상 /운경재단 제공
8남매가 부대끼며 산 안채에는 끝없이 밥상을 차려내야 했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인피니티’(2020) 등이 설치됐다. 해마다 산더미처럼 많은 양의 김장을 해야 했던 뒷마당에는 높이 5m가 넘는 배추 조형물이, 사랑채 손님을 맞기 위해 일꾼들이 수없이 드나들던 길목엔 ‘천하 아줌마 대장군’(2008)이 서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밥상, 꽃의 향연’(2022). 1000명이 넘는 운경재단 장학생과 후원자 중 일부가 전시를 위해 손때 묻은 밥그릇, 한약탕기, 물병 등을 보내와 밥상을 차려냈다.

이번 전시는 운경고택의 세 번째 전시로 하루 5회 관람할 수 있다. 회당 16명으로 제한하고 1시간20분의 관람 시간이 주어진다. 전시는 6월 17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