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시신이 하염없이 포격 소리가 나는 마리우폴의 꽁꽁 언 땅 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다." -AP통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두 달째에 접어들면서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유엔에 따르면 러시아의 공격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숨진 민간인은 1200명에 육박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전쟁 승리라는 덧없는 목적에 취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생명을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공격 대상에는 남녀노소 예외가 없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동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은 러시아의 쉴 새 없는 포격으로 사실상 폐허가 된 상태입니다.

민간인 시설에 대한 러시아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마리우폴 내 죄 없는 어린이들은 지옥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아이들의 시신이 마리우폴의 땅 구덩이 속에 박히고, 18개월 된 아기가 러시아의 포격 때 파편을 머리에 맞고 피를 흘리고, 10대 어린 학생이 학교 운동장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폭발에 두 다리가 날아가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숨을 잃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부모의 모습도 마리우폴에서는 이제 생소한 일이 아닙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욕심이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모든 세상과 가치를 빼앗고 있는 것이죠.

도를 넘는 푸틴 대통령의 잔혹함에 세계 정상들은 러시아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앞서 강력한 경제 제재로 러시아를 압박한 미국과 동맹국들은 최근 군수 공급망에 대한 추가 제재 시행까지 검토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러시아를 겨냥한 보이콧 현상은 정부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일종의 성역으로 여겨졌던 예술계에서까지 친 푸틴 성향의 음악가들을 퇴출하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세계 정상급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무대에서 추방당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사진=한경DB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사진=한경DB
'러시아 음악계의 표트르 대제' 또는 '지휘대 위의 차르'로 불렸던 세계적인 지휘자 게르기예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그간 쌓아왔던 모든 명예와 권위를 잃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함께한 뮌헨 필하모닉은 지난달 게르기예프를 해고했고, 빈 필하모닉은 뉴욕 카네기홀 방문 공연 지휘자를 게르기예프에서 야닉 네제 세갱으로 교체했습니다. 게르기예프는 최근 네덜란드 대표 오케스트라인 로테르담 필하모닉에서도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세계 최고 오페라 극장인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또한 지휘자 교체를 단행했죠.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던 게르기예프가 순식간에 무대에서 외면을 당하는 인물로 추락하고 만 것입니다.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 등 유럽의 각종 예술 축제도 잇따라 게르기예프와의 계약을 취소하고 있습니다. 게르기예프는 음악 감독직을 맡고 있던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도 자리를 빼앗긴 상태입니다. 음악계에서는 60대의 나이까지 왕성하게 활동해 온 게르기예프가 올해를 기점으로 전 세계 무대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란 관측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게르기예프가 타국에서 재기하는 일은 사실상 없을 것이라 본 것입니다.

예술계가 연일 게르기예프에 대한 냉정한 결정과 판단을 내놓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푸틴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로 친 푸틴 성향을 보이는 대표 음악가이기 때문입니다. 게르기예프와 계약된 오케스트라, 오페라 극장 등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휘자 측에 전쟁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소극적인 지지를 천명한 셈입니다. 과거 게르기예프가 푸틴 대통령의 2014년 크림반도 강제 합병을 두고 공개 지지에 나선 것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무대에서 내려온 친 푸틴 성향의 음악가는 또 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세계 정상급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지난달 추후 예정된 모든 공연 일정에서 자진 하차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친 푸틴 성향을 보이는 예술가에 대한 음악계의 퇴출 압박이 거세지자 스스로 무대에서 내려온 겁니다. 이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네트렙코가 푸틴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철회하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향후 예정된 공연에서 물러나게 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전쟁을 발발한 푸틴 대통령의 행보를 지지하는 음악가들이 세계 무대에서 추방되는 현상은 일부분 타당한 처사로 보이기도 합니다. 반전쟁이라는 국제사회의 암묵적인 합의에서 벗어난 존재들에게 그들의 결정이 결코 존중될 수 없음을 알리는 메시지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 입장에서는 전쟁을 지지하는 음악가의 예술을 통해 감정의 환기를 취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음악 단체가 이를 규탄하고자 하는 조치는 꽤 의미 있는 결단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예술은 음악가의 경험과 감정, 생각, 철학이 녹아있는 결과물인 만큼 청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러시아의 예술 자체를 배척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우려스러운 점입니다. 최근 러시아 보이콧 현상이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는 일부 음악가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이미 타계한 러시아 대표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를 거부하는 움직임으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영국의 카디프 필하모닉과 일본 예술극장 비와코홀은 올해 음악회 연주곡으로 예정됐던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프로그램에서 삭제하기로 했습니다.

러시아의 승전을 담은 작품으로 현시점에 연주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입니다. 러시아가 타국을 점령한 것이 아닌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아낸 것을 기념한 작품이었더라도 말이죠. 그러나 '1812 서곡'이 자신의 자발적 의지로 작곡한 것이 아닌 의뢰에 의한 작품이었단 점과 할아버지 고향 우크라이나의 민요를 따온 작품을 작곡해 온 점 등을 고려하면 차이콥스키 음악 자체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세계에서 러시아의 예술이 외면당하는 현실 또한 푸틴 대통령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란 점입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예술상 수상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의 예술과 문화를 지워버리려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공인이 잘못을 저지르면 배척하는 현상인 '캔슬 컬처'가 러시아 음악가들을 향하고 있다고 꼬집은 것입니다.

푸틴 대통령은 캔슬 컬처에 대해 운운하기에 앞서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 러시아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동등한 위치에서 존중받고 있었음을 말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목숨과 가치를 빼앗는 것을 넘어 자국의 예술이 지녀온 가치까지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푸틴 대통령이 인지하길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생명과 러시아의 예술이 사라지는 지옥의 문이 걷히고 모든 나라의 아이들이 청명한 하늘만 바라보며 함께 자라나는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길 바랍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