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전염병·전쟁…요즘 세상, 과거로 퇴보"
“죽음은 우리에게 형이상학적 사고를 하게 만들죠. 제가 오랜 세월 전염병에 대해 생각해온 이유입니다.”

신간 《페스트의 밤》(민음사)을 펴낸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사진)은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국내 언론사들과 한 공동 서면 인터뷰를 통해서다.

전작 《고요한 집》과 《하얀 성》에서도 페스트를 다뤘던 그는 이 소설에서는 전염병을 맨 앞으로 끌어올렸다. 1901년 오스만제국 시절 민게르라는 가상의 섬에서 페스트가 퍼지고 의문의 살인 사건과 함께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렸다.

파묵은 이 소설을 2016년부터 집필했다. 원고를 털어낼 무렵 코로나19가 터져 당황했다고 한다. ‘코로나19란 좋은 소재가 나오자 급하게 소설을 쓴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다시 손봤다. 10년간 페스트에 대한 책과 자료를 읽은 것을 토대로 팬데믹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는데, 막상 팬데믹이 현실화하자 실제와 다른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120여 년 전 페스트를 다뤘지만,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파묵은 “그때도 통치자들은 전염병의 존재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며 “그러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누가 전염병을 가져왔느냐’며 남을 탓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소설에서는 종교적, 민족적 갈등으로 이어진다. 그는 “오스만제국은 서구 제국주의로 인해 붕괴한 게 아니라 내부 민족주의 갈등에 의해 쪼개진 것”이라며 “이런 사회적 변화를 촉발한 것이 당시의 페스트”라고 말했다.

소설의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우연이 아니다. 대표작인 《내 이름은 빨강》도 미망인 세큐레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파묵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여성 주인공이 사건의 모든 것을 보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지정학적 갈등이 커지는 것에 대해선 “과거의 세계로 퇴보하는 것 같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움베르토 에코가 ‘중세로의 회귀’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정말 어떤 의미에서 중세가 다시 도래했습니다. 중세 시대엔 두 왕이 ‘이 마을은 내 것, 저 마을은 네 것’이란 식으로 협약을 했었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자유는 무시하고요. 지금 상황도 그때와 비슷합니다.”

스스로 낙관론자라는 파묵은 “팬데믹이 끝날 것으로 본다”며 “그때가 되면 한국을 찾아 박물관도 가고, 거리도 거닐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두 번 한국을 방문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