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아이가 그리는 하얀 수묵화
‘천상의 화원’을 수놓았던 봄꽃 철쭉과 여름꽃 범꼬리, 가을꽃 구절초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야생화를 대신해 하얀 눈꽃이 만개한 소백산의 겨울은 사계절 중 가장 눈부시다. 능선과 봉우리마다 수북이 쌓인 눈이 햇살과 하늘을 반사해 시퍼렇게 하얀 빛을 내뿜는다.

겨울 왕국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영하 20도의 한파를 이기고 눈 덮인 산길을 끝없이 오른 이들만 입장할 수 있다. 매해 겨울 설산 등반에 도전하는 이들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물으면 미소로 답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능선 위 하얀 눈밭을 뽀드득 뽀드득 길을 내며 걷는 쾌감은 어차피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설산의 매력은 희귀함에 있다. 해발 1000m가 되지 않는 도심 주변의 산에서는 상고대를 보기 힘들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소백산, 덕유산, 태백산, 한라산 정도는 돼야 언제 가더라도 눈꽃 핀 설산을 만날 수 있다. 의지와 체력이 필요한 만큼 봄이나 가을에 비해 인파가 적다. 다만 케이블카로 정상인 향적봉 근처까지 오를 수 있는 덕유산에는 등산객이 많은 편이다.

북서풍이 나무와 부딪히며 내는 산 속 파도소리는 설산에서만 들을 수 있는 희귀품이다. 지리산 천왕봉이나 소백산 비로봉의 유명한 강풍을 마주하자면 대자연 앞 나약한 인간이 느껴진다.

설산에는 포근함도 있다. 주목 군락을 소복이 덮은 눈의 푹신함에 등산객들의 목소리가 나직이 잠긴다. 왠지 나도 목소리를 낮춰야만 할 것 같다. 폭신한 눈을 밟으며 상고대 사이를 걸으면 그 비현실적 아름다움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눈의 밀도도 도심에서와는 다르다. 훨씬 더 뽀드득거리는 눈을 밟을 수 있다.

날씨는 운이지만, 어떤 날씨를 만나도 상관 없다. 청명한 날에는 눈 덮인 봉우리와 능선, 계곡의 설경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다. 눈이라도 오는 날엔 겨울산의 풍미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봄을 기다리면서도 가는 겨울이 아쉬운 이유는 이런 설산의 매력 때문이다. 바람 속 봄내음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눈꽃이 더 녹아버리기 전에 등산화와 아이젠, 스틱을 챙기고 겨울 산행에 나서보자. 하산 후 일행들과 내년 설산 등반을 계획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백산=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