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과 3의 예술'은 아름다운 음악과 뛰어난 그림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7과 3은 도레미파솔라시 7계음, 빨강 초록 파랑의 '빛의 3원색'을 의미하는데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작품은 모두 이 7계음과 3원색으로부터 탄생합니다. 이를 어떻게 조합할지 고민하고, 그 결과물을 펼쳐 보이는 게 곧 예술이죠.

'7과 3의 예술'은 화제가 되고 있는 공연이나 전시를 살펴보고, 예술가들의 고뇌와 철학을 경유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채워줄 작고 소중한 영감을 전합니다.
피아니스트 블라드미르 호로비츠가 연주한 '트로이메라이'. /아다지에토 유튜브 채널

음악은 때로 예술가의 삶 자체를 보여줍니다. 자신의 꿈, 추억, 사랑 등에서 영감을 받고 음악으로 고스란히 표현한 경우가 그렇죠.

독일 출신의 음악가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1810~1856)이 대표적입니다. 슈만은 비평집 <음악과 음악가에 관한 문집>에 "나는 살아온 인생과 작품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슈만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트로이메라이'는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을 담고 있습니다. '작은 꿈'이란 뜻을 갖고 있는 트로이메라이는 슈만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쓴 곡들을 모은 소품집 <어린이 정경>의 일곱 번째 곡입니다.

어려운 연주 기교를 최대한 자제하고 가벼우면서도 서정적인 선율이 인상적이죠.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어릴 때 품은 작고 소중한 꿈들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롯이 담긴 음악은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비춰주는 등대가 되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드미르 호로비츠가 60년 만에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와 은퇴 독주회를 열고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도 트로이메라이였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고향에 갈 수 없었지만, 언젠가 꼭 돌아가겠다는 꿈을 트로이메라이를 들으며 키워 온 것이죠. 그리고 그 깊은 회한과 꿈을 이룬 감동을 담아 이를 마지막 곡으로 연주했습니다.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슈만은 트로이메라이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인 클라라 슈만을 향한 애절한 사랑, 정신착란으로 인한 극심한 내적 갈등과 고통도 음악에 전부 녹여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슈만의 음악은 거의 다 그의 영혼에서 흘러나왔다"라고 말했을 정도죠. 슈만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음악 세계와 삶 속으로 함께 떠나 보겠습니다.

슈만은 독일 작센 지방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출판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를 닮아 어릴 때부터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습니다.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7세 때 피아노 즉흥 연주를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슈만은 문학과 음악을 함께 즐겼고, 집에서도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해 줬습니다.

하지만 그가 16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계 걱정을 해야 했던 어머니는 슈만이 보다 안정적인 길을 가길 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슈만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법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음악은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회에 갔던 슈만은 큰 감동을 받고, 피아노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슈만은 당시 유명한 피아노 선생이었던 프리드리히 비크를 만나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비크는 슈만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음악 스승인 동시에 훗날 부인이 된 클라라의 아버지니까요.

슈만은 니콜로 파가니니와 같은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는 '비르투오소'가 되겠다는 목표로 비크의 밑에서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죠. 너무 무리해 피아노 연습을 하다 오른손 약지가 부러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노 대신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또 자신이 가진 문학적·음악적 재능을 결합해 음악 평론가이자 편집자로 변신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하는 평론가들과 함께 <음악 신보>라는 잡지를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탁월한 안목으로 음악사에 길이 남을 인물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프레데리크 쇼팽도, 요하네스 브람스도 슈만의 글 덕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슈만의 부인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슈만.

슈만의 부인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슈만.

슈만은 클라라와의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장인인 비크와 소송을 벌인 일부터 브람스, 클라라와 삼각관계에 있었던 점까지 모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비크는 자신이 평소 너무나 아끼던 외동딸 클라라가 슈만과 만난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클라라는 슈만보다 9살이나 어렸고, 미성년자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비크는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있었던 슈만의 연애사도 다 꿰뚫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슈만이 가난한 음악가라는 점도 마땅치 않아 했습니다. 당시 슈만은 음악 평론을 쓰고 작곡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클라라는 탁월한 피아노 실력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했을 때 이미 클라라의 명성이 슈만보다 더 높았죠.

두 사람은 비크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슈만과 비크는 결국 서로를 향해 소송을 걸었는데요. 다행히 클라라가 성인이 되면 두 사람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고, 1840년 슈만과 클라라는 부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클라라는 슈만에게 영혼의 안식처이자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뮤즈였습니다. 슈만은 결혼 후 클라라의 응원과 내조 덕분에 음악 작업에 매진하며 교향곡, 실내악 등을 두루 만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가곡을 남겼는데요. 클라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담아 <시인의 사랑>이란 가곡집도 냈습니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16편을 골라 선율을 입힌 것으로, 슈만은 이 가곡집을 클라라에게 바쳤습니다. 트로이메라이에 슈만이 품은 작은 꿈이 담겼다면, 시인의 사랑엔 슈만의 커다란 사랑이 녹아 있는 것이죠.
테너 스타니슬라스 드 바르베이락이 부른 <시인의 사랑>중 '아름다운 5월에'. /프랑스무지크 유튜브 채널

이 소품집의 첫 번째 곡인 '아름다운 5월에'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름다운 5월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초조한 마음과 소원을." 사랑이 시작될 때의 두근대는 설렘과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슈만이 클라라의 능력을 약간 질투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클라라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전해지죠. 그래서인지 클라라는 자신만의 연습실을 가지지 못했고, 피아노 연습도 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클라라는 슈만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그의 곡이 나오면 직접 연주를 맡아 주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슈만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가 됐고, 러시아 공연에서 큰 성공도 거뒀습니다. 1850년엔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성과들로 장인 비크와의 오랜 갈등도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비크는 이들 부부와 화해하고 응원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슈만은 1853년 브람스를 만나게 됐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삼각관계의 시작이죠. 슈만은 브람스의 스승이 되었으며, 그의 뛰어난 재능을 소개하는 글을 써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브람스는 스승의 부인인 클라라와도 가까워졌고, 마침내 사랑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습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이 부부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도 함께 슬퍼하며 적극적으로 도왔죠.

슈만의 불행은 정신착란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집안 내력과도 일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신경쇠약으로 세상을 떠났고, 누이도 자살을 했습니다.

슈만도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갈등이 생기자 라인 강에 뛰어들어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배에 발견돼 살았지만 이후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첼리스트 요하네스 모저와 베를린필이 함께 연주한 '첼로 협주곡 a단조'. /베를린필 유튜브 채널

평소에도 그는 깊은 내면의 갈등을 겪었는데요. 이를 자신의 비평에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두 자아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들을 번갈아 사용하며 비평을 한 것이죠.

그중 밝고 낙천적인 시선을 가진 자아의 이름은 오이제비우스였으며, 다소 거칠고 격정적인 감정을 분출하는 자아의 이름은 플로레스탄이었습니다. 슈만은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을 때론 대립시키고 때론 융화시켜 가며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두 자아의 성향을 반영해 음악도 다양하게 만들어 냈죠.

그러나 슈만은 결국 정신 병원에 입원한지 2년 만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는 병원으로 면회 온 클라라를 껴안고 "나도 알아"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유언이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경고성 의미를 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죠.

하지만 클라라는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묵묵히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브람스 역시 슈만의 남은 가족들을 도와줄 뿐이었습니다.

꿈과 사랑, 그리고 내면의 고통까지 가득 담아 음악과 글로 표현한 슈만. 그의 작품들이 더욱 마음 깊숙이 와닿는 건 이 격정적인 로맨티시스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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