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자신의 대표작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소개하고 있다. 본인의 얼굴을 흙으로 빚은 소조로 표면이 갈라진 미완성작이지만 가장 애지중지하는 작품이다.  /신경훈 기자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자신의 대표작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소개하고 있다. 본인의 얼굴을 흙으로 빚은 소조로 표면이 갈라진 미완성작이지만 가장 애지중지하는 작품이다. /신경훈 기자
22일 개인 전시회를 여는 소조 작가 김준규 씨(67)는 정년을 넘겨 데뷔한 ‘늦깎이 작가’다. 여느 작가들과 달리 그에겐 한 가지 특이한 경력이 있다. 대한민국 검찰들을 지휘하는 ‘검찰총장’ 출신이라는 것. 총장직을 내려놓은 후 국내 유명 로펌 변호사까지 맡았지만 “흙이 좋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며 ‘흙 작가’로 변신했다.

검찰총장 시절 늘 입던 양복보단 청바지와 예술가처럼 기른 장발이 더욱 익숙해졌다는 김 전 총장. 전시회를 앞두고 찾아간 그의 서울 용산구 자택엔 40여 점의 소조 작품이 집 안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작업한 작품을 모아 22~28일 서울 북촌 한옥갤러리 일백헌에서 ‘흙을 만지며 다시, 나를 찾다’ 전시회를 여는 김 전 총장을 만났다.

그에게 흙 작가로 새 출발하는 까닭을 물었다. 김 전 총장은 “검찰, 변호사의 길을 걸으면서 그 이후의 삶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며 “변호사로 인생의 ‘연장전’을 사는 것보다 평생의 취미였던 소조로 또 다른 출발점에 서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으로 인생 전반전…남은 생은 흙 작가로 살겁니다"
그가 소조를 처음 접한 것은 고교(경기고) 1학년 시절. ‘비운의 천재 조각가’로 유명한 권진규 작가(1922~1973)의 ‘소녀상’을 우연히 교과서에서 접한 게 시작이었다. 권 작가 특유의 사실주의적 인물상에 매료된 고교생 김준규는 곧바로 학교 내 소조반을 찾아 등록했다. 소조에 푹 빠져 수업조차 ‘땡땡이’를 쳤을 정도였다. 타고난 손재주 덕분에 홍익대가 주최한 미술경시대회에서 ‘조소 부문 1위’까지 차지했다.

“그땐 ‘내가 정말 재능이 있구나’라고 생각해서 진로까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땡땡이를 너무 쳐서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줄은 몰랐죠. 55명 있는 반에서 47등을 했으니까요. 그땐 성적표를 들고 부모님께 도장을 받아와야 했는데 ‘야단났다’고 생각했죠. 다행히 혼나지 않고 넘겼지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공부에만 전념했지요.”

타고난 재능의 배경엔 집안에 흐르는 ‘예술가의 피’가 있다. 김 전 총장의 부친인 고(故) 김형근 전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 교수는 일본 내에서 ‘음악 명문’으로 불리는 도쿄예술대 음악학부를 나온 피아니스트였다. 해방 이후 최초로 나온 음악 교과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이 고된 탓이었을까. 누나들에겐 가르쳐준 피아노를 아들인 자신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아 그는 못내 아쉬웠다고 털어놨다.

“제가 손이 좀 큽니다. 피아니스트인 아버지를 닮은 거죠. 그런데 피아노 칠 줄은 몰라요. 당신께서 예술가로 고단하셨으니 제게 다른 길을 가라고 일부러 그러셨던 것 같아요. 제가 법대에 합격했을 때도 참 좋아하셨죠. 그런데 제가 예술의 길로 다시 들어선 걸 생각하니 아버지와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번 작품 중에 아버지 흉상이 있는데 빚고 보니 저와 너무 닮아서 참 놀랐습니다.”

소조를 잊고 검사의 길을 걸은 그가 다시 흙을 접한 건 20여 년이 흐른 1994년 주미 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근무하면서다. 클레이 모델링 강의를 수강해 홀로 작업했고, 다시 10년 뒤 광주고검 차장검사로 일하면서부터는 조선대 미대 교수를 찾아가 강의를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흙을 빚었다. 로펌에 사표를 낸 후엔 서재 한 켠을 작업공간으로 마련해 작품 활동에 매달렸다.

석고, 밀납, 유토 등 많은 소조 재료 중 하필 흙만 고집한 이유가 있을까. 김 전 총장은 “흙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이라고 답했다. 흙이기 때문에 빚다가 갈라지기도 하고, 때론 굽다가 터지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 하나하나가 오히려 더욱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작품 역시 표면이 갈라진 미완성 자소상(自塑像) ‘메멘토 모리’다. 전문 작가들이라면 버렸을 실패작이지만 그에겐 첫 자소상인 만큼 의미가 깊다. 갈라진 얼굴이 마치 죽음을 연상시켜 작품 제목도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지었다.

“굽지 않은 흙 소조는 물에 담그면 녹습니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지요. 흙 소조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할까요. 제가 나중에 죽음을 맞이할 땐 이 작품을 물에 담가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도 했습니다.”

작가로 제2의 삶을 출발한 만큼 작품 활동 계획도 세웠다. 한 사람의 인생을 드러낼 수 있는 30개의 흉상을 제작하겠다는 것. 필요하다면 몇 달이나 동행하면서 ‘사람’ 자체를 탐구해 작품으로 담아내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작업 공간도 집안 서재보다 더욱 넓은 곳으로 옮길 계획이다.

“프로 작가가 된 만큼 책임감을 느낍니다. 낚시꾼이 아니라 전업 어부의 심정으로 임해야죠. 의뢰인도 저도 만족할 만한 제대로 된 30개 작품을 남기고픈 게 흙 작가로서 남은 인생 포부입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