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벤게로프가 연주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패션포바이올린 유튜브 홈페이지

"그의 실력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어린아이 수준이다."

'파우스트' 등을 쓴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한 얘기입니다. 모차르트를 뛰어넘는 실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니, 이야기 속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해집니다. 그 주인공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입니다.

그의 음악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인지하지 못했을 뿐, 멘델스존의 음악 중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곡들이 많습니다. 영상 속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곡입니다.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들과 함께 세계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도 꼽히죠. 이뿐만 아니라 결혼식장에 가면 꼭 들려오는 '결혼행진곡'도 멘델스존의 작품입니다.

멘델스존은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 명곡들을 남겼지만, 그의 삶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배경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멘델스존은 다른 예술가들과 좀 다른 인생 행보를 보였습니다. 클래식계에서 단연 독보적인 '행운아' '엄친아' '금수저'였죠. 그래서 오히려 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그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음악과 문학을 사랑했습니다. 덕분에 음악이 맑고 투명하면서도, 품격 있죠.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 지는 것 같습니다. 멘델스존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과 작품 세계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품격 있는 클래식계의 행운아, 멘델스존[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멘델스존의 이름인 펠릭스. 이 단어는 라틴어로 '행운' '행복'을 뜻합니다. 그는 정말 이름처럼 행운과 행복이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파리와 함부르크에서 큰 은행을 경영하는 은행가였고, 어머니는 궁정 은행가 집안의 손녀였습니다. 명문 은행가끼리의 결혼이었던 것이죠. 그 사이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큰 혜택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가이면서도 시의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엔 유명 인사들이 항상 오갔습니다. 작곡가부터 시인, 철학자 등도 다수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는 이들과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예술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 어머니는 유명 음악가들을 고용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음악 교육을 시켰죠.

심지어 그의 집엔 전속 오케스트라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멘델스존이 작곡을 하면 전속 오케스트라가 그의 곡을 연주한 겁니다. 자신이 만든 곡을, 그것도 어릴 때 만든 작품을 전속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을 수 있었다니 정말 놀라운 재력이죠.

멘델스존의 재능은 이런 유복한 환경을 바탕으로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었죠. 10대 때 이미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오페라 곡까지 다양한 장르의 곡도 썼습니다.

그가 12살이 되던 해, 스승인 첼터는 그를 데리고 괴테를 찾아갔습니다. 괴테는 모차르트의 연주도 평가절하했을 만큼 까다로웠는데요. 이 소년의 연주엔 흠뻑 매료돼, 매일 그의 연주를 듣고 산책도 다녔다고 합니다.
베를린필하모닉이 연주한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 베를린필하모닉 유튜브 홈페이지

멘델스존은 어렸을 때부터 문학, 여행도 좋아했습니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문학과 철학 서적을 주로 읽었죠. 17세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읽고 서곡을 완성했습니다. '결혼행진곡'은 이 작품에서 커플들이 우여곡절 끝에 합동결혼식을 울리는 장면에 울려 퍼지는 곡입니다.

그의 이런 시적 감수성은 '무언가 집'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노래 없이 피아노로만 노래하는 작품'이란 뜻으로 간결하면서도 고상한 곡들로 구성돼 있죠.

다른 예술가들처럼 작곡을 위해 다수의 여행도 다녔는데요. 여행지에서 느낀 점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표현해 내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낭만을 담아 '교향곡 4번 이탈리아'를 만들었고,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핑갈의 동굴'도 작곡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을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듯 담았기 때문에 생동감이 넘치죠.

멘델스존은 분명 금수저에 행운아였지만, 누구보다 음악에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부지런히 살며 작곡과 연주에 몰두했습니다. 그만큼 명성도 자자했습니다. 특히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그의 음악을 사랑했죠.

그는 뒤셀도르프의 음악감독,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으로도 일했습니다. 특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며 확실한 입지를 다졌습니다. 단순히 박자만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단원들의 역량을 끌어올려 최고의 음악을 선사하는 뛰어난 지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줬죠.

그는 지휘봉의 보급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휘봉을 쓰면 어두운 조명에도 단원들이 지휘자의 지시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데, 멘델스존은 이를 잘 활용해 단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베를린필하모닉이 연주한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 베를린필하모닉 유튜브 홈페이지

멘델스존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재조명 받게 된 음악가들도 있습니다. 묻힐 뻔한 명곡과 음악가를 발굴하는 심폐 소생 능력이 탁월했던 것이죠.

그중 대표적인 음악가가 바흐입니다. 바흐는 세상을 떠난 후 빠르게 잊히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아들들이 더 유명했을 정도죠.

그런데 1829년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지휘하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로 인해 19~20세기에 바흐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됐고, 오늘날까지도 바흐의 음악은 음악가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멘델스존은 정말 완벽한 삶을 산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늘은 그를 너무 일찍 데려갔습니다. 그는 38살의 나이에 요절했는데요. 누나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은 그보다 4살이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자라면서 함께 음악을 공부하고, 그 기쁨을 공유했습니다. 누나는 동생 못지않게 음악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싶어 했죠.

그러나 여성이란 이유로 전문 음악인이 될 수 없어, 많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래도 동생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곡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조금씩 하려던 때, 고혈압으로 돌연 세상을 떠났습니다.

멘델스존은 누구보다 아꼈던 누이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쓰러졌을 정도였죠. 그리고 그는 누나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발작을 일으키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사후에 한동안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이란 이유로, 히틀러가 집권하는 동안 그의 모든 작품은 금지곡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노력들도 계속됐습니다.

이런 수난에도 그는 다시 부활했습니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명곡은 어떤 위기에도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요.

클래식계 독보적인 행운아였던 멘델스존. 그의 음악을 듣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도 큰 행운을 가진 것 같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