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과 3의 예술'은 아름다운 음악과 뛰어난 그림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7과 3은 도레미파솔라시 7계음, 빨강 초록 파랑의 '빛의 3원색'을 의미하는데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작품은 모두 이 7계음과 3원색으로부터 탄생합니다. 이를 어떻게 조합할지 고민하고, 그 결과물을 펼쳐 보이는 게 곧 예술이죠.

'7과 3의 예술'은 화제가 되고 있는 공연이나 전시를 살펴보고, 예술가들의 고뇌와 철학을 경유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채워줄 작고 소중한 영감을 전합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오르세미술관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오르세미술관

화사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춤도 추네요. 이들의 입가에 옅게 번진 미소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꼭 봐야 할 작품으로 꼽히는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입니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대표작이죠. 도시의 자유분방하고 멋진 광경, 이곳에 사는 파리지앵의 여유롭고 활기찬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이 작품을 비롯해 르누아르의 그림 대부분은 아름답고 생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죠.

그럼에도 행복이 가득한 그림을 그렸던 것은 르누아르만의 확고한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림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인생이나 다른 작품에도 충분히 많다"라고 말했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 그리고 행복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으려 했던 르누아르의 삶과 작품 세계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35세의 자화상, 1876, 매사추세츠포그미술관

35세의 자화상, 1876, 매사추세츠포그미술관

르누아르는 가난한 가정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은 물론 생계를 이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덕분에 일찍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재봉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평소 그림을 즐겨 그리는 걸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으로 평생 밥벌이를 할 것을 권했습니다.

르누아르는 13세에 도자기 장인 밑으로 들어가 도자기 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이 이 일을 워낙 좋아했고, 재능도 뛰어나 돈을 꽤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모든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도자기도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도자기에 일일이 그림을 그려 넣는 일자리도 사라졌습니다. 르누아르도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그만둬야 했죠. 그는 대안으로 부채 등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며 가까스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예상치 못한 위기 속에서도 그의 꿈은 자라났습니다. 루브르 미술관 옆 골목에 살던 그는 그곳에 걸린 명작들을 보며 모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식 화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해부학 강의를 듣고, 화실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습니다.

르누아르는 화실에서 미술 인생에 큰 도움이 될 인물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등 인상파 화가들을 사귀게 된 것이죠. 원만하고 사교적인 성격의 르누아르는 이들과 적극 어울리며 새로운 화풍에 눈을 떴습니다.
오리 연못, 1873, 밸리하우스갤러리

오리 연못, 1873, 밸리하우스갤러리

모네와는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그리며, 서로의 작품을 비교하고 견해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오리 연못'은 모네가 살고 있던 아르장퇴유에 있는 연못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를 통해 르누아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변화를 화폭에 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도 이들과 함께 한동안 인상파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살롱전에서 입상도 하며 주목을 받는 듯했는데요.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며 르누아르 또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 르누아르는 인상파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됐습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 냈죠.. 고전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고전주의와 인상주의 화풍을 절묘하게 결합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상파 화가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작품 대상이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주로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에 반해 르누아르는 사람에 주목했습니다. 소설가 에밀 졸라가 "르누아르는 무엇보다 사람을 그리는 화가"라고 정의했을 정도입니다.

르누아르는 영리하게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배운 빛의 표현법을 사람을 그리는 데 활용했습니다. 빛의 명암을 이용해 사람들의 얼굴과 피부가 더욱 두드러지고 빛날 수 있도록 했죠.

특히 여성과 아이들을 많이 그렸는데요. 이들의 따뜻함과 생기를 부드러운 색감과 붓 터치로 표현했습니다.
시골에서의 춤, 1883, 오르세미술관

시골에서의 춤, 1883, 오르세미술관

도시에서의 춤, 1883, 오르세미술관

도시에서의 춤, 1883, 오르세미술관

르누아르의 작품들에선 생생한 역동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르누아르의 춤 연작인 '도시에서의 춤', '시골에서의 춤'에 잘 드러납니다. 이리저리 방향을 돌리며 몸을 움직이고 있는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해 냈죠.

춤을 추는 작품이 아니어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보면 실제 피아노를 연습하는 소녀들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악보를 넘기면서 건반을 치는 소녀, 곁에서 악보를 함께 보며 피아노를 가르쳐 주고 있는 듯한 소녀의 모습이 실감 나게 표현돼 있죠.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르누아르는 계속 시장에서 외면당했습니다. 그림을 꾸준히 그렸지만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웠죠. 르누아르 스스로 "물감을 살 여유조차 없다"라고 하소연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40대 전후로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인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샤르팡티에 부인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서서히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 아이들'이란 작품은 살롱전에서 큰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후엔 더욱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1889년엔 르누아르의 작품이 '프랑스 미술 100년전'의 전시작으로 선정됐으며, 1892년엔 정부로부터 '피아노 치는 소녀들' 등 다양한 그림 작업을 의뢰받기도 했습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 오르세미술관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 오르세미술관

하지만 명성과 함께 다시 고통도 찾아왔습니다. 자전거에 떨어져 부상을 당한 것인데요. 그 후유증으로 심각한 류머티즘 발작에 시달렸습니다. 상태가 계속 악화돼, 잘 걷지도 못하고 손으로 붓을 잡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르누아르는 마비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묶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극심한 고통에도 그의 화풍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작가 본인은 힘들지만, 그림은 여전히 따뜻하고 화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

사람들의 미소와 행복을 화폭에 담는 일. 르누아르는 그것을 자신의 과업이자 숙명이라 여기고 어떤 어려움에도 묵묵히 해냈습니다. 그 신념과 열정 덕분에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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